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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는 없다

분류
파트너멤버
작성자
최수진
주짓수를 시작한지 벌써 5개월 정도 됐다. 5개월이 지나는 동안 한 번의 승급이 있었다. 주짓수는 다른 무술과 다르게 벨트 승급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벨트 끝에 달려있는 검은 판, 쁘레따에 테이프를 감아서 경력을 표시한다. 감은 테이프를 그랄이라고 부르고 4그랄이 되면 그 다음에 벨트 승급을 할 수 있다. 승급 체계는 관장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어떤 기준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나간 대가로 두달 반 만에 1그랄을 달았다.
체육관에 있는 여자 관원 중에서는 내가 두 번째로 등급이 높다. 그만큼 중도 포기하는 여성 관원이 많다. 확실히 쉬운 운동은 아니다. 모든 운동이 몸만큼이나 머리 회전율이 좋아야한다지만 상대방과 겨루는 운동은 확실히 혼자하는 운동보다 신경써야할 것들이 많다. 상대방의 움직임도 미리 예측해야하고 무슨 기술을 써야할지, 간파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두뇌싸움에서 이긴다고 상대를 척척 제압하면 좋겠으나 이 모든 것은 피지컬이 받쳐줬을 때의 가정이다.
여자 관원들 중에서는 꽤 잘한다고 생각한다.(우리 체육관 내에서의 경우) 아무래도 자주 나오다보니 기술을 많이 기억하고 있고 폴댄스와 웨이트로 다져진 근력덕에 힘에서 많이 밀리는 편도 아니다. 주짓수가 무술 중에서는 가장 체급을 덜 탄다고 하는데 가끔 남자 관원과 스파링을 할 때면 무력감을 느낀다. 내가 암만 기를 쓰고 기술을 걸려고 해도 힘에서 밀려 놀아날때면 살짝 기분이 나쁘기까지 하다. 물론 남자인걸 떠나서 나보다 주짓수를 오래한 사람들이라는건 잘 알고 있다. 근데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걸 어떡해.
인터넷에 ‘노력 없이 부자가 되고 싶다’ 류의 짤은 유행을 막론하고 자주 보인다. 노력 없이 하루 아침에 무언가가 척척 되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모든 것에는 단계가 있다. 26년간 모르고 살았던 주짓수의 재능이 저 깊은 곳에서 깨어나 갑자기 국가대표급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천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재능이 있더라도 겨우 5개월차에 블루벨트를 달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요즘 주태기(주짓수+권태기)가 와서 투정을 조금 부려봤다. 매일 출석하던 초반과 달리 웨이트를 병행하느라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하루씩 빠지고 있다. ‘노력없이 잘하게 되면 참 좋을 텐데’라는 헛된 꿈을 꾸며.
왕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 실력없이 자존심만 강해서 괜시리 무력함과 우울함을 느낄 때 이 사실을 상기해주면 마음이 한결 후련해진다. ‘그래, 난 이제 시작했는데 못하는게 당연하지.’, ‘난 초보다, 시작하자마자 잘했으면 벌써 십 년전에 스타킹이나 영재발굴단에 나갔을 것이다.’ 십 년전에는 영재발굴단이 없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안전가옥이 네이버 블로그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가졌다. 작가들마다 임의로 이모지가 달려있는 것을 최근에 봤는데 내 이름 옆에 병아리 이모지가 붙어있었다. 참으로 적절한 이모지다. 다른 멤버들과 달리 단편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없고 글을 써야겠다 마음 먹은지 2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내가 뭐라고 이들 사이에 껴있는건지, 내가 쓴 문장은 왜 이리 형편없는지, 어휘력은 또 왜이렇게 딸리는지, 참 재기 바빴다. 세상에 글 쓰는 사람은 또 왜이렇게 많은 건지, 글 잘 쓰는 사람 이렇게 많은데 내 글을 누가 읽기나 할지.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글 쓰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면 나 한 명이 숟가락 올린다고 달라질 세상도 아니다. 그냥 차근차근 쁘레따에 그랄을 달아가면 되는 것이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에는 왕도가 없고 매일 꾸준히 하는 것만이 중요하니까. 언젠가는 닭이 되어있기를 바라며.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최수진
"지난 달을 돌아보니 운동한 기억밖에 없어요.. 운동하려고 퇴사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