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세 들어 사는 건물은 복도가 ㄱ자로 되어 있습니다. 왼쪽으로 10세대, 오른쪽으로 15세대. 총 25세대가 한 층에 살아요. 복도가 두 방향으로 나뉘는 지점에는 공용 라커룸이 있습니다. 거기는 방에 놓을 수 없는 짐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죠. 그러니까, 제 말은 거길 지나지 않으려야 지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얼마 전, 그 공용 라커룸 앞, 복도가 둘로 나뉘는 그 지점에 놓여있던 짜장면 그릇이 사라졌습니다, 드디어. 노란색 비닐봉지에 싸인 채 복도 구석에 놓인 게 아마 두 달도 더 됐을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거길 지나는 사람 모두가 분명히 그 그릇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릇이 그 자리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것을 매일같이 지나치면서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배달원 탓을 했습니다. ‘재활용 그릇으로 음식을 배달했으면 수거도 제대로 해야지.’하면서요. 그 생각은 한동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뭐야, 누군지 몰라도 무책임하잖아.’ 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 그릇은 여전했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그 위로 먼지도 쌓였습니다.
일주일 아니 이 주쯤 지나자, (누군지 몰라도) 음식을 시킨 사람 탓을 했습니다. ‘그릇을 안 찾아가면 전화를 해서 알려주거나, 치우거나 해야 할 거 아냐.’ 하면서요.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갔습니다. 보나 마나 그릇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뭐야, 누군지 몰라도 정말 무책임하잖아.’ 했어요. 다음에는 청소 아주머니를 탓했습니다. 아주머니야말로 매일 보실 텐데, 왜 저걸 그대로 두시는 걸까. 그러다가 탓은 다시 돌아 음식을 시킨 사람에게로 향했습니다.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갈 때쯤이었어요. 유독 피곤한 퇴근길이었습니다. 캄캄한 복도에 센서등이 켜졌습니다. 역시 노란색 비닐봉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본 척 만척하며 저벅저벅 걸어서 집에 들어갔죠. 그러곤 생각했습니다. 나도 참 너무하네.
한 달쯤 지나니 그 층 복도를 매일같이 지나는 저 또한 그 탓에서 벗어날 수 없겠더라고요. 마치 화분 밑받침에서 고인 물이 조금씩 흘러넘치다가 그 일대를 모조리 엉망으로 만드는 것처럼, 탓이라는 게. 그리고 책임이라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자라는구나. 결국은 우리가 모두 발이 젖는구나.
누가 한 일인지는 몰라도 눈에 가시 같았던 짜장면 그릇은 저희 층에서는 퇴출당하였습니다. 어느 날 보니, 1층 외부 복도에 놓여 있더군요. 그리고 또 얼마 뒤, 경비 아저씨의 손에 의해 버려졌습니다. 대부분 책임을 진 자보다 의무를 진 자가 마지막을 도맡죠.
이게 뭐,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과도한 생각이 아닌가 싶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요, 이 일 이후로 알고도 모른 척하는 일은 없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책임을 모른 척하고 있는 일은 없는지, 짜장면 그릇 버려두듯이 내버려 둔 일은 없는지 생각하게 되곤 해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보고도 못 본 척했던 일을 발견했으니, 저로선 꽤 따가운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론 더 늦기 전에 치울 건 치우려고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헤이든
"짜장면 그릇으로 월간 안전가옥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음 번엔 왕십리역 얌체들에 대해서 써볼까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