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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를 하면서 이야기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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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부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어둠땅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 불타는 성전부터 와우를 시작했고 수능칠 때 대격변을 신나게 즐기다 10년이 지나 다시 이 게임을 하게 되었다. 서버는 아즈샤라고, 내 캐릭터 ‘짭짤’은 불페라 복원 주술사다. 오랜만에 이 위대한 게임을 하고 있자니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뭐, 대도시들 생김새도 많이 바뀌고 게임의 시스템 자체도 상당히 달라지긴 했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가서 힘을 합쳐 악당들을 처리하는 레이드 같은 컨텐츠는 여전히 즐거웠다.
10년 전에 할 때는 어려서 반사신경도 빠릿빠릿하고 작업속도도 좋을 때라 게임을 잘 하기도 했고 시간도 썩어났기 때문에 게임을 정말 하드코어하게 즐겼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다. 요새는 이전보다 느슨하게 플레이하면서 게임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이전에도 관련된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나는 한국사보다 아제로스의 역사에 더 빠삭할 정도로(국사 성적은 대학 입시에 필요했지만 아제로스 역사 성적은 아무 데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블리자드가 만든 워크래프트의 세계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나는 워크래프트 3의 캠페인의 다이얼로그 한 줄 한 줄이 햄릿의 그것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왕국을 좀먹는 역병의 근원을 처단하러 북풍의 땅 노스렌드까지 찾아왔다가 결국 막다른 궁지에 몰린 왕자 아서스가,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승리하기 위해 저주받은 검 서리한을 찾았을 때, 그 검을 수호하는 망령들을 마침내 물리쳤을 때, 그가 망령에게 “너는 아직도 내게서 이 검을 지키려고 하는군.”이라고 묻자 망령이 “아니, 나는 이 검으로부터 너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대사를 쳤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찬다.
하지만 와우의 이야기는 갈수록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워크래프트 3에서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왔던 인물들은 다 죽거나 이상하게 변했고, 탐험할 세계는 다 탐험했으니 세계를 확장시키는데 설정이 계속 충돌하고, 새로 나오는 인물들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거나 그 동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았다. 특히 가장 한소리를 많이 듣는 것은 툭하면 인물들이 ‘타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니까 왜 그런 평가를 받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게임은 꾸준히 성취감을 제공해야 하고 플레이어는 지속적인 승리를 거쳐 재미를 얻는다. 워크래프트 3은 전략 시뮬레이션이었고, 플레이어는 악의 진영과 선의 진영을 번갈아가면서 시점을 바꿔서 플레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와우는 MMORPG고, 플레이어는 필연적으로 선한 진영에 속한 용사라는 게 이야기 전개를 상당히 쉽지 않게 만드는 듯 하다.
일단 MMORPG의 플레이어는 반드시 익명이다. 세상을 십수번 구원한 용사 중의 용사들인데 그 이름은 세계관에 항구적으로 남지 못한다. 결국 세계가 확장될 때마다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편지 배달이나 똥 뒤지기(실제로 그런 퀘스트가 있다) 따위의 잡일을 해야 한다. 시나리오 라이터들은 이걸로 고민을 꽤 했는지, 플레이어들이 이룬 업적을 다른 주요 인물이 해냈다고 설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 적도 있었다. 그 인물은 플레이어들에게 업적 도둑이라는 멸칭을 선사받았다고 하니 딱히 좋은 해결책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는 반드시 악역을 무찔러야 한다. 와우의 핵심 컨텐츠인 레이드는 20~30명의 사람이 몰려가서 악의 근원을 제압하는 것이다. 뭐 보스를 잡는 도중에 보스가 중간에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죽였다가 선한 진영의 누군가가 플레이어들을 되살리는 식의 연출 등으로 보스의 힘을 어필할 수 있지만, 어쨌든 악역은 반드시 패배한다.  나는 이게 이야기를 엄청나게 빠르게 소모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그 패배를 유야무야 처리해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저번 확장팩의 주요 악역이었던 아즈샤라는 죽지 않고 도망치기만 했는데, 플레이어들은 거기서 상당히 김이 빠졌다고 한다.
괜찮은 악역을 만들려면 서사를 꾸준히 쌓아올려야 하는데, 플레이어에게 성취감을 주려면 그 악역을 죽여야만 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결국 악역은 별 동기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레 나쁜 짓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워크래프트 세계에서 선역이 타락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을 나도 옛날에 비난했는데, 나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역으로 만들어 두면 플레이어에게 살해당할 위협 없이 서사를 쌓아나갈 수 있다. 그렇게 충분히 서사를 쌓아나가다 타락시키면 이야기 깊은 악역이 하나 뚝딱인 것이지.
그래서 MMORPG의 이야기가, 특히 와우처럼 십수년 된 게임의 이야기를 잘 쌓아나가기는 많은 고통이 따르지 않나 생각한다. 요즘은 세계관의 빌딩 자체를 둘러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직렬적인 서사 대신 병렬적으로 세상 자체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건 게임 시나리오의 가장 커다란 매력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확장팩의 배경인 어둠땅은 워크래프트 세계의 사후세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 사후세계가 상당히 흥미롭다. 이 사후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력이고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랑 틈만 나면 전쟁을 벌인다고 하는데, 내가 속한 강령군주라는 집단은 그 사후세계의 선한 군대다. 근데 이 군단은 흔히 완전한 악역으로 묘사되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 그러니까 언데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상하게 정신이 똑바로 박힌 좀비와 해골 병사들이 나름대로의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는 세계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심너울
“나의 짭짤은 나스리아 성채 신화 막공을 찾고 있습니다. 열심히 치유하겠으니 불러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