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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애잔왕 - <테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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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월간 안전가옥, 운영멤버들은 "올해의 ㅇㅇㅇ"이라는 주제로 썼습니다. 아쉽고, 새롭고, 빠르고, 기묘한 2020년. 2020년에 본 콘텐츠 중에 상을 주고 싶은 작품, 인물, 장르 등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올해의 애잔왕은 누구인가요? *대상 콘텐츠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뤽이 뽑은 올해의 '애잔왕'

테넷 영화
10년이 넘었다. 뭐 성격 때문인지 나름 이런저런 루틴을 좀 가지고 있는 편인데 특히 연말이면 빠지지 않고 해오던 이 리추얼(들)을 시작한게 2010년이니, 올해로 11년째가 된다. 매해 봤던 콘텐츠들을 다시 한 번 보고, 그 중 매체별로 최고의 콘텐츠를 하나씩 꼽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개인 블로그에 올린다. 이런 류의 기록들이 보통 그러하듯 할 때는 좀 귀찮고 낯간지럽고 때로는 좀 내가 너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좀 그렇지만, 하다보면 그리고 해놓고 나면 아 내가 그렇구나 하고 볼 수 있기도 하다. 아니 내가 그때 그랬다고? 아 내가 지금 이렇다고?
이렇게 한 해를 돌아보는 시점이 되면 가장 놀라게 되는 건 그 콘텐츠의 소비량..이다. 아니 내가 (알고는 있었지만) 책을 이렇게 안읽었다고? 아니 뭔놈의 만화책을 이렇게 봤지? 아 내가 이제 웹소/웹툰을 꽤 보니 얘네는 부문을 분리하는게 맞나? OTT에서 본 영화랑 극장에서 본 영화랑 어디에 어떻게 기록하지? 같은 부문으로 놓는게 맞나? 이런 류의 놀라움. 하지만 그래도 이런 기록의 미덕은 가능한 기존의 카테고리를 유지하면서 일관성있는 비교를 하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내 나름의 전통적인 기준에 의거해서 각각 부문을 좀 꼽아보면
올해의 소설/웹소설: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추공 <나 혼자만 레벨업>
초엽작가님의 작품은 꽤 의외였고, 충격이었으며 감동적이었다. 10만 부를 훌쩍 넘긴 핫샷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작년을 휩쓸었다. 장르와 문단 모두에서 사랑을 아끼지 않았고, 비슷한 시기 주목 받았던 뭇 작품들이 서서히 잊혀지는 중에도 시장과 업계 모두에서 여전한 존재감을 뽐낸다. 그런 와중에 후속작을 그것도 장편소설을 낸다고 하니 (하물며 나도 엄청x100 기대했는데) 주변에서는 얼마나 기대가 컸을 것이며 작가님은 얼마나 부담되었을까. 그렇게 나온 작품이, 밀리의 서재에서 선공개 중인 SF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이었다.
정체불명의 먼지가 지구를 덮어버린 기후 재난 상황에서 그 먼지 이슈를 해결할 새로운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커뮤니티, 여성의 연대와 사랑을 다루는데 그게 너무 멋진 스타일의 장르로 묶인다. 종이책이 워낙 잘 팔렸던 만큼 혹여나 전작들보다 ‘문학적인’ 작품이 나올까 했던 것은 나의 기우였다. 훌륭한 SF였고, 정말 감각적인 플롯의 이야기였다. 메가히트 데뷔작 이후 후속작이자 첫 장편이었던 이 작품이 이렇게 잘 뽑혀져 나오다니. 당분간 김초엽의 시대가 이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좋았다.
<전지적 독자 시점> 이후 웹소설이라는 매체에 눈을 새로 떴고, 틈틈이 시간을 쪼개 몇 작품을 더 읽었다. 분량 때문인지 문법 때문인지 (내가 올드해서인지..) 대부분 완주하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완주한 작품이 지금 웹툰으로 흥행 중인 <나 혼자만 레벨업>이었다. 뭐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의 재미는 사실 내가 말을 얹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재미있다. 이 작품은 카카오페이지에서만 265만명이 구독한다. 대구광역시 인구보다 많은 숫자다.
올해의 만화/웹툰: <하지메 알고리즘>, <개 같은 세상>
올해 읽은 만화책 중 가장 여운이 길게 남았던 건 <하지메 알고리즘>. 이전에 EBS의 다큐멘터리 <문명과 수학>을 볼 때 감각을 비슷하게 느꼈다. 대수, 기하, 위상 등 수학이라는 언어가 갖는 자체의 감동이 만화적으로 잘 그려졌다. 웹툰 중에서는 단연 다음웹툰의 <개 같은 세상>이 좋았다. <혹성탈출>의 독특한 변주처럼 개들이 사람을 반려인으로 데리고 사는 외계행성을 다루는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언어’에 있다. 정종수 작가는 이 작품에서만 쓰이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서 이 ‘소통의 어려움’을 표현하는데, 아 암튼 이건 작품을 봐야 안다. 초강추.
올해의 영화/드라마/쇼: <테넷>, <사이코지만 괜찮아>, <나의 문어 선생님>
놀란이 (<인셉션>보다) 놀란했다. 어찌보면 이해하기 어렵고, 어찌보면 쉽다. 서사 자체에 대한 상징과 은유를 잔뜩 담은 작품으로 보이고 그런 측면에서 곰곰 곱씹어볼 때 더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저 큰 화면에서 ‘영화적인 경험'을 하기에 이 작품만한 작품은 찾기 어렵다. 저걸 어떻게 찍었을까, 저런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싶을 정도의 말도 안되는 시퀀스들로 가득하다. 특히 종반부 전투씬은 무슨 롤러코스터를 타듯 짜릿한 쾌감으로 넘쳐난다. 뭐 메시지도 혼란하지만 그럴싸한게 놀란은 놀란이다. (왓챠 익스클루시브인 <데브스>와 같이보면 더 혼란하고 좋다)
뭐 이제 업자가 된 만큼 반쯤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영상을 본다. 특히 OTT 콘텐츠들, (솔직히 그동안 잘 보지 않았던) 한국 드라마들을 볼 때 더 그렇다. 그런데 올 여름 완전히 폭 빠져서 본 드라마가 <사이코지만 괜찮아>였다. 첨엔 서예지 비주얼에 홀려서(?) 별 생각없이 보기 시작했다가 사랑에 빠졌다. 이 작품은 트라우마를, 그리고 트라우마에 빠졌다가 극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상과 비정상을 다루기도 하고, 용기와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코로나 등으로 인해 화나고 지친 모두가, 보면서 치유받을 수 있을 만한 훌륭한 콘텐츠였다. (PPSS에 올라온 감상을 추천한다.)
<나의 문어 선생님>에 대한 평은 지난 달 월간 안전가옥으로 갈음.
그래서, 이 중 하나의 픽션에 상을 주자면,
애잔왕 <테넷>이다. 사실 이게 애잔한 이유는 이야기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맥락 때문.
2020년 최고의 이슈는 코로나19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모든 다른 이슈를 집어삼켰고, 업계를 거의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테넷>은 그 변화를 상징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손익분기점이 무려 8억 불에 달한다는 이 작품은 올해 워너 브라더스의 최고 기대작 중 하나였는데...
개봉 시기를 계속 조정하다가, 울며 겨자먹기로 개봉했고, 나름 개봉 첫주엔 1위를 하긴 했지만 놀란 최초의 흥행 실패작이 되었다.
테넷은 11월 말 현재 글로벌 흥행이 3.56억 불에 불과했고, 워너는 이 작품으로만 현재까지 5,400억 원 이상의 손해를 봤다.
식겁한 워너는 원더우먼1984의 개봉을 부랴부랴 미뤘고, 한국사업은 아예 접는다. (워너코리아 최재원 전 대표는 송강호/김지운과 제작사 설립)
이걸 보고 깜짝 놀란 소니는 제작비 2억불 이상 되는 영화의 개봉을 무기한 연기했고, 디즈니는 주요 작품을 디즈니+에만 풀었다.
그렇다면 누가 극장에 가나. 미국의 제1위 극장체인 AMC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2위 시네월드 역시 조 단위의 적자를 기록했다.
놀란은 시네마의 정점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테넷>은 가장 놀란 시네마 다운 영화였다. <테넷>은 코로나에 완벽히 패배했고, 전통적인 시네마 산업이 무너지고 있다는 지표가 되어버렸다. 국내라고 다를까. 3대 극장체인이 모두 가격을 올리고, 스크린을 줄인다. 투자배급사의 투자심의가 몇달째 열리지 않고있다는 얘기가 있고, 많은 제작사들 역시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뭐 언제고 올 거라는 생각이야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다. 이젠 진짜 극장에 걸리는 시네마라는 것이 어쩌면 곧 LP나 필름사진 같은 그런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올해 극장에 가서 본 유일한 영화였다. 여러모로 상징적이고, 그래서 더 애잔하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뤽
"아 진짜 그러고보니 저 일년에 극장에 딱 한 번 간게 거의 초딩 이후 처음 같아요. 군인일 때도 이것보다 자주 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