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달 예고대로 궤도 애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 합니다.
철도 애호가 아니라 궤도 애호라고 운을 뗀 것은 제가 넓은 의미로 궤도에 의존하는 것들을 대체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레일 위를 달린다는 의미를 떠나서, 궤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계획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그 정해진 계획대로 일이 벌어지는 것에서 신뢰가 창출됩니다. 그 신뢰할 수 있다는 감각이 정말 좋아요. 정해진 순서대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이 주는 듬직한 느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2.
현대 대도시는 이러한 궤도의 개념 없이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대량의 시민들을 저마다의 주거지로부터 일터로 실어 나르기 위해, 철도, 전차, 버스와 같은 각종 대중교통들이 설치됩니다. 철도나 전차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노선 위를 달린다는 개념에서는 버스도 궤도이고, 어쩌면 자차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자택에서 직장으로 이어지는 궤도 위를 달리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도시형 궤도 교통은 정해진 노선에 따라 꽉 짜여진 삶을 상징하여, 시간제로 착취되는 현대인의 삶을 나타내는 부정적 메타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러시아워 만원 전철에 시달리다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기 어렵죠. 하지만 우리가 일을 포함한 각종 의무로부터 어차피 자유로울 수 없다면, 출퇴근의 수단에 불과한 궤도교통에게 그 무거운 책임을 전부 돌리는 것은 조금 부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직업적 의무감을 치워 놓고 생각해 보면, 정시성이 보장된 궤도 교통은 우리가 무슨 계획을 세우든 평등하게 우리의 이동을 보장해 줍니다. 노선과 시간표가 제공되고 우리는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 궤도 위에서, 우리는 익명화되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으면서도 도시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나라의 끝에서 끝으로, 원하는 만큼 이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범위는 신뢰할 수 있는 궤도 위에서 극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도시 궤도교통의 변화와 관련해서 추천하고 싶은 박물관 전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3월 29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시인 “서울의 전차”입니다. 대한제국 시절 서울에 처음으로 전차 노선이 개통된 이후, 서울 시민들이 근대화와 함께 겪은 생활상의 변화를 풍부한 사료와 함께 촘촘하게 조망한 좋은 전시입니다. 박물관 앞에는 서울에 마지막으로 다녔던 전차 차량이 보존되어 전시 중이기도 한데, 이건 상설 전시물입니다.
3.
지상에 철도가 있다면, 바다에는 항로가, 하늘에는 항공로가 존재합니다. 시간을 맞추어 운행되는 국제 교통수단도 아주 폭넓은 의미에서는 정해진 궤도 위에서 운행되는 궤도 교통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간을 맞추어 운행되는 국제교통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전 세계 모든 곳으로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친구와 일주일 정도 전에 약속을 잡는 것은 평범한 일이죠. 만약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 빠르면 몇 시간 내로, 길어도 며칠 내로 도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도 일주일 정도만 미리 약속을 잡으면 문제 없이 만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먼 나라에 살고 있지 않더라도, 먼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또는 우리가 먼 나라 사람들을 필요로 할 때 그 곳에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계 모든 사람들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4.
궤도에 의해 신뢰가 보장되면 그 바탕에서 두려움을 감수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 탈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가장 극적인 예로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가 있습니다. 이것도 궤도애호에 포함되냐고요? 당연하죠. 선로가 있는 열차인데, 위에 나열한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궤도적이지 않습니까?
롤러코스터는 탑승한 사람들에게 낙하와 회전의 스릴을 안겨주는 놀이기구입니다. 이 스릴 말인데요, 같은 수준의 추락을 사람이 맨 몸으로 겪으면 몸이 성하기가 어렵습니다. 낙하의 스릴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뇌가 극도의 공포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퍼붓는 뇌내 흥분의 결과물입니다. 자연적으로는 그 흥분된 뇌를 이용해 두려운 포식자와 맞서 싸워야 하거나, 뒤이어 찾아올 부상의 끔찍한 고통을 상쇄하는 게 전부일 것입니다.
우리가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서 즐거움만 챙겨 나올 수 있는 것은 궤도가 안전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추락해도 죽지 않고, 뒤집혀도 튕겨 나가지 않도록, 롤러코스터는 안전이 보장된 궤도 위에서 정해진 속도로 운행합니다.
좀 더 넓게 생각해 보면, 롤러코스터의 궤도는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궤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설계 방법, 안전 규정, 정비 스케줄, 운영 매뉴얼 등까지도 궤도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정해진 방법 대로 짓고, 정해진 방법 대로 관리하기에, 비로소 정해진 궤도를 정해진 대로 운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해진 규칙에 의해 시스템이 운용되고 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날로 복잡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고, 그렇게 보장된 안전 위에서 우리는 많은 도전을 시도할 수 있게 됩니다.
5.
불행하게도 세계적인 궤도 탈선이 일어나는 시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위에 적은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시 “서울의 전차”는 현재 관람할 수 없습니다. 박물관이 현재 무기한 휴관 중에 있습니다. 먼 나라를 잇는 항로들이 끊어지고, 이웃이 되려고 할 필요 없으니 병이나 옮기지 말아 달라며 빗장을 거는 일들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대중교통은 정시 출퇴근을 보장해 주고 있지만, 이제는 집에서 재택 근무를 하라고 합니다. 혼란스럽네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궤도를 벗어난 것들이 다시금 궤도 위로 돌아오겠죠. 시스템을 신뢰한다는 것은, 시스템이 때로 오작동하더라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다시 정상 궤도로 복귀할 것에 대한 신뢰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정상 궤도로의 복귀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대한 지지와 응원까지도요.
“서울의 전차” 전시를 지금 관람할 수는 없지만, 해당 전시의 도록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전시의 모든 부분을 섬세하게 실어 놓았고, 박물관이 재개관하면 뮤지엄 샵에서 구할 수 있을 거에요. 오늘의 궤도가 불확실하더라도, 이렇듯 멀리 내다보이는 궤도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메꾸어 보고 싶습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시아란
“따뜻한 봄이 오면, 따분한 일상이 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