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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작성자
홍지운
분류
파트너멤버
작업 공간을 새로 꾸몄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작업 공간을 꾸며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생활 공간에야 몇 개 인테리어 겸 더했던 물건들이 있지만 작업 공간까지 꾸며보기는 처음이에요. 아마 이 공간에 슬슬 제 냄새를 묻혀도 되겠다는 안도가 생긴 덕분이겠지요. 과연 이 안도가 제대로 된 판단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요.
연구실에는 지금 제가 항상 갖고 싶어했던 독서용 큰 의자가 있고, 혹여나 아침 수업으로 지쳐 고꾸라졌을 때를 대비한 침대를 갖다 놓았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는 ‘여기는 연구를 위한 공간도, 생활을 위한 공간도 아닌 생존을 위한 공간 아니냐?’라는 평을 들었지만 저 나름대로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취향인가 봐요. 돈이 없어서도 있지만요.
더불어 작업실에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거장, 스누피 작가님의 초상을 붙여놓았습니다. 대표적인 이미지가 담긴 초상이에요. 개집 위에 타자기를 놓고 앉아 타이핑을 하고 있는 이미지요. 당연히 타이핑하는 그 내용은 It was a dark and stormy night고요.
제 돈을 주고 제 공간을 꾸밀 포스터를 사긴 14년 만인 것 같아요. 전에 산 포스터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006년에 있었던 라울 루이즈 특별전 포스터거든요. 딱히 라울 루이즈 영화가 감명 깊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색의 대비가 좋아서 샀었고 사면서도 어휴 참 예술충 노릇하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랬긴 합니다. 어느새 그 시기부터 여기까지 왔군요. 취향에 대해서는 좀 더 솔직해지긴 했네요. 라울 루이즈에서 찰스 슐츠로 바뀌었다면요.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소설로써 좋은 도입인지는 모르겠어요. 스누피를 대표하는 한 문장이 된 덕에 누가 이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도 유쾌한 패러디에 머물지 않고서야 아무래도 어려울 테고요. 하지만 이 문장은 스누피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크고 강한 울림이 있는 것 같다고,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매력적인 부분은 어둡다는 것도,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다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이었다. 그것은 이제 끝난 일이다. 지금은 아니다. 그 순간만큼은 무엇보다도 혹독했으나 이 모든 것은 지난 일이다. 어두움마저, 폭풍우마저 그렇게 지난 일이라고 단정짓는 선언에는 분명 깊고 거센 울림이 있지요.
그리고 이 거센 울림은 스누피라는 인물을 무엇보다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해요. 스누피는 강아지죠. 그저 강아지예요. 한 소년의 가족인. 작가로서의 커리어는 결코 좋다고 하기 어렵고 비행사 놀이를 하며 소일거리로 하루를 보내지ㅛㅗㅕㅓ요. (이 부분은 고양이가 타이핑한 것이지 오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강아지가 거창하게도 고된 삶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또 거기에 더해 모든 것이 종식되었다는 준엄한 판결문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이 오만함에는 괄목할만한 무언가가 있어요. 스누피라는 캐릭터의 본질을 말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요.
요 근래 제 신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나 온갖 지점에서 요동치고 널을 뛰는 그런 1년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그 다음 페이지를 준비하고 있지요.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웠고 또 이후가 기대됩니다. 그래서 저도 제 이야기의 이번 장은 이렇게 시작해볼까 해요.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라고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홍지운
“고양이 밥값을 벌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잘 팔아서 캣타워를 사줘야만 합니다. 분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