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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공작왕 - 오라나랍 의수 <후궁견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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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가디언 멤버 OU
파란만장한 2020년도 어느덧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전무후무한 전염병과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격리의 해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이래저래 적응하고 있는 것 보면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우리의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격리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덜 지루하게 달래준 큰 공신이 바로 책들과 넷플릭스, 왓챠 등의 드라마들이었다. 워낙 시간이 흘러넘치다 보니 평소에 보던 드라마만 보던 나조차도 점점 샛길로 빠져서 한번도 보지 않던 옛날 드라마 등을 봤던 것 같다.
4월의 월간 안전가옥에 썼었던 <테일즈 오브 더 시티>도 그 중 하나였고, 오늘 월간 안전가옥에서 얘기할 <후궁견환전>도 3주 내내 자가격리하던 때 정신 없이 봤던 내 최초의 중국 드라마였다. 처음에는 스토리가 너무 산발적으로 널뛰기를 하며 진행을 해서 연출을 뭐 이따구로 했나 욕을 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원래 76부작짜리 대작을 미국용으로 6부작으로 압축시켰던 것이 이유였다.
처음에는 순진하고, 야심 없던 견환이 옹정제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황제의 총애와 후궁들간의 암투에 휘말려 피도 눈물도 없는 권무술수의 달인으로 거듭나는 <후궁견환전>은 나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물론 나의 최신 버전 정치적 올바름에는 너무나 부합하지 않는 후궁 초야를 위한 이불말이나, 어머니와 아내가 앉아 남편의 첩을 고르는 장면 등등에서 온 문화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하지만 이런 80년대 기준 감성에도 내가 이틀 꼬박 바쳐가며 <후궁견환전>을 끝냈던 이유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최대한 중립적이고 입체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견환도 시간이 흐르면서는 점점 악당에 가까운 권무술수를 부리는 모습을 보여줬고, 반대로 드라마 초반에 굉장한 존재감을 자랑한 화비 같은 경우에도 결국 알고 보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권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미래에 항상 불안해하는 모습들이 잘 나타났다.
그런 궁중 여인들 중에서도 내게 독보적인 존재감을 남긴 캐릭터라면, 단연코 황후-’오라나랍 의수’를 꼽을 것이다. <후궁견환전> 전체의 최종 보스는 옹정제 본인이지만 활약으로 치면 그는 이벤트성 보스에 가까웠고, 실제로 견환이 경험치를 쌓아서 대적해야 했던 끝판왕은 바로 황후였다.
<후궁견환전> 초반에 직접적으로 패악을 부리거나 견환에게 적대심을 보였던 화비와 달리, 오라나랍 의수는 후반부에 견환과 본격적으로 날을 세우기 전까지는 철저히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공격은 대부분 그녀에게 은혜를 입은 다른 후궁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지령조차도 암시와 상황 설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녀의 공작이라는 증거 자체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 모든 것을 그녀를 절대 바라보지 않는 옹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름 뿐일지언정 유일한 ‘황후’로 남기 위해 벌이는 오라나랍 의수가 주인공 보정을 등에 업은 견환에 의해 몰락하는 것을 보며 여러가지로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뭐랄까, 이미 누가 안 건드려도 충분히 불행하고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모든 걸 뺏긴게 안쓰러웠달까. 따지고 보면 황제가 진짜 악당이었지만 벌은 황후가 받는게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 결말은 차치하더라도, 황후가 공작을 벌이는 술수만큼은 배울 만한 부분이 많다. 철저하게 대외적 이미지는 유지하면서도 손을 쓰지 않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그 센스만큼은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교양 지식인 것이다.
누구와도 척을 지지 않고 사는게 꿈이고, 누구에게도 잘못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다지만 인생사라는게 어쩔 수 없이 숨만 쉬어도 어떤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역적으로 몰린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2020년이었다. 아무리 평화주의자인 나라지만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왕이면 이런 문제 해결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해결하는 오라나랍 의수의 술수를 좀 배워서 활용해야 하는게 아닌가란 자못 어두운 생각을 하게 된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가디언 멤버 OU
"20년 후 제 일대기가 나온다면 2020년을 흑화의 해로 지정하고, 제가 벌였던 정의의 공작들이 수록되었으면 좋겠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