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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

분류
파트너멤버
작성자
전건우
슬럼프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슬럼프를 통해서 겸손을 배우게 된다. 어느 유명인이 남긴 명언이라는데, 그럴듯한 말이지만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소리다.
슬럼프는 아무리 포장을 해도 슬럼프일 뿐이고 그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는 패배감이 다다. 지옥의 맨 하층에 떨어져 벌을 받기를 기다리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차라리 벌이라도 받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그게 아니니 조마조마하고 괴롭고 머리 아프고 심장은 벌렁거리고 아무튼 아주 그냥 짜증난다.
다른 영역의 창작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설가는 몇 개월에 한 번 정도 꼭 슬럼프를 겪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소설을 쓴다는 건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경우 육체가 먼저 지치기 때문에 슬럼프가 찾아온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가 힘드니까 계속 침대에서 뒹굴고, 그러다 보니 소설은 진도가 안 나가고, 또한 그러다 보니 난 재능이 없다거나 세상 똥멍청이인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멍청이에도 단계가 있다면 나는 똥보다도 더 최악인 그냥 돌멩이 정도의 멍청이일 거라고, 몇 주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슬럼프인 것이다. 똥은 거름이라도 되지…….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왜 슬럼프가 없었겠나. 수도 없이 슬럼프를 겪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짧게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조금씩 극복을 해나갔다. 제주도나 속초가 내게는 치유의 지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19 탓에 집밖을 벗어날 수도 없고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 멀리 갈수도 없으니 이 갑갑한 슬럼프를 벗어나기가 참 힘들다.
내가 아는 선배 작가는 슬럼프가 심하게 올 때면 통장을 텅 비운다고 한다. 쓸 데 없는 물건도 사버리고 평소 사고 싶었던 것도 다 사고 해서 그야말로 ‘플렉스’를 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뒤 텅빈 통장을 보면서 의지를 불태운단다. 아니, 통장을 보면 없던 의지도 생기며 슬럼프 따위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단다.
좋은 방법 같은데 내 통장은 이미 비어 있다는 사실!
동료 작가 중 한 명은 슬럼프가 온다 싶으면 아예 글을 안 쓰고 게임이나 독서를 즐겨버린다고 한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넷플릭스라도 보려고 하면 양심의 가책이 생겨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나는, 그런 성격인 것이다.
쓸 수도 없는데 어쨌든 컴퓨터 앞에 앉아 빈 화면을 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성격. 완전 돌멍청이인 거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슬럼프가 최고점을 찍으면 거짓말처럼 원래 상태로 돌아와 미친듯이 쓴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이 거의 최고점에 다다른 것 같으니 곧 예전의 속도를 되찾을 거라고 기대해 본다.
슬럼프는 극복하려 할수록 빠져드는 늪과 같다는 어떤 명언도 있었는데 나는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생각으로 그저 기다리고 있으면 늪의 깊이가 그다지 깊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러곤 저벅저벅 걸어나오는 거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런 날을 기다리며…….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전건우
"이런 중에도 새 장편소설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마귀>인데요, 정말, 정말 힘들게 쓴 이 소설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썰’을 풀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