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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엘리자베스 뱅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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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뭘 했냐고 물으신다면 (안 물어보셨다고요? 죄송합니다) <피치 퍼펙트 2>, <피치 퍼펙트 3>을 봤다고 말하겠어요. 생일로부터 일주일 쯤 전에 넷플릭스에서 <피치 퍼펙트>를 봤는데 시리즈 나머지 작품들은 없길래 유튜브에서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나머지 시리즈를 결제했던 것이다. (사실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이미 원룸용 빨래 건조기를 샀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느낌으로……) 피치 퍼펙트 시리즈를 다 보고 나서 <미녀 삼총사 3>까지 보는 사이 생일이 끝났다.
피치 퍼펙트 시리즈를 아직 보지 못하신-그 중에서도 앞으로 보실 생각이 있는 분을 위해 스포일러 없이 간단히 소개하자면 피치 퍼펙트 시리즈는 장차 음악 프로듀서가 되기를 꿈꾸며 취미 겸 특기는 매쉬업 리믹스인 베카(애나 켄드릭 扮)라는 소녀가 바든대학교의 전통 있는 여성 아카펠라 동아리 ‘바든 벨라스’에 가입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스포일러는 지금부터 나옵니다. (스포일러가 그렇게 중요한 시리즈인가? 싶지만 아무튼)
지역 예선, 주 본선, 전국 결선을 거치면서 바든대의 양대 아카펠라 동아리 벨라스와 트레블 메이커스의 무대를 감상하는 재미며 매쉬업 전문가이자 힙스터인 베카가 정신적 성장을 이뤄가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나, ‘팻 에이미’ 캐릭터(레벨 윌슨 扮)의 다소 파괴적인 잔망스러움이라든지 릴리 역할을 맡은 한국계 배우 하나 메이 리의 개인기라든지 뭐 기타 등등 여러 재미를 누릴 수가 있는 시리즈지만, 이 시리즈를 처음 접했을 때 일단 내 눈을 사로잡은 첫 번째 후크는 영화의 감초 역할 겸 별 도움 안 되는 해석을 맡은 진행자- 둘 중에서도 ‘게일’ 이라는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저 완벽하게 생긴 여자를 내가 어디서 봤더라? (+저 완벽하게 생긴 여자가 왜 저런 -여기서 ‘저런’이란 ‘멍청한’ 이라는 뜻이다- 대사들을 읊고 있는가?)
~라는 충격을 내게 안긴 인물인데, <피치 퍼펙트>를 세 번 보고 <피치 퍼펙트 2>를 보기 시작할 즈음에야 답을 알았다! 시트콤 <모던 패밀리> 시리즈의 ‘살' 이었다! “난 똑똑하고, 난 아름답고, 침대에선 전설적이지.” 라고 말하는 여자. 그러고 보니 모던 패밀리에서 처음 봤을 때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리터럴리 자알도 생겼고 대사는 하나같이 정신이 나간 느낌이구나…… 게일의 대사들은 아슬아슬하게 성희롱적이고 또 금을 밟았지만 안 밟은 척 하는 정도의 인종차별 요소도 있지만 일단 옆에 있는 존이라는 남자의 대사보다는 아주 약간 낫다. 존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게일은 입으로만 웃고 눈으로는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그건 내가 게일에게 품고 있는 호감에서 비롯된 해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지만 <피치 퍼펙트> 마지막쯤 가서는 “당연히 당신은 예상 못했겠죠~ 당신은 여성혐오주의자Misogynist니까~” 같은 사이다 대사를 날리기도 하는 게일. 때문에 나는 혼자, 게일 당신은 대학시절 ‘월경 주기’라는 여성 아카펠라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만큼(이 부분은 영화 공식 설정이다) 여자들간의 연대와 우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페미니스트지만…… 아카펠라를 너무 좋아해서 존 같은 쓰레기하고 함께 일할 수밖에 없는 거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거죠? 그런 거죠? -같은 캐해석을 해 보기도 했고…… <피치 퍼펙트 2>부터는 존을 하차시키고 단독 호스트로 떠오르는 게일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피치 퍼펙트 2>를 볼까 말까 고민을 꽤 했지만 게일이 혼자 일하기를 바라는 만큼 영화의 다른 내용들도 (가령 베카랑 클로이 사이에 좀 진전이 있을까? 팻 에이미가 이번에는 무슨 활약을 펼칠까? 전작에서 전국대회 우승을 했는데 2에서의 목표는 대체 뭘까? 디펜딩 챔피언 정도는 넘 시시하잖아……) 궁금했기 때문에 실제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피치 퍼펙트 2>는 대부분의 상업 뮤지컬 영화-그리고 전작이 그러했듯 딱 기대한 만큼의 재미가 있었고, 웬걸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장면도 있었는데, 내가 제일 궁금해한 요소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게일이 독립을 못한 것이다. 게일과 함께 아카펠라 팟캐스트 진행자를 맡은 존은 전작보다 훨씬 더 많은 꼴값을 떨어댔고, 그의 꼴값은 영화상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 직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슬프게도 그 꼴값에는 게일도 동참했는데, 필리핀 대표팀을 언급하며 “저도 필리핀 가서 레이디보이들하고 재밌게 논 적이 있고요”(존의 대사) 라고 하질 않나, 한국 대표팀을 언급하며 “누가 한국팀 신경이나 쓸까요?” (게일) / “불고기 좋아요~” (존) 같은 대화를 주고 받질 않나…… 즉 아시아에 이 영화를 팔고 싶었다면 절대 넣어선 안 되었을 대사들이 버젓이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 꼴통 롤을 맡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여서 아슬아슬하게 용납이 될까말까 한 것이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가 아니고 백인-미국인 둘이 젠더 이슈와 인종 이슈의 빨간 버튼을 동시에 연타하는 그 느낌이 싫어서 약간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문제를 작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 유튜브에서 구입 가능한 <피치 퍼펙트 2> 영상에서는 “한국 불고기” 어쩌구 장면에서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다. 영어 대사만 나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개봉 당시에는 아예 그 장면을 삭제했었다고 한다. 참나……)
따라서…… 역시 게일한테 크게 실망했지만 어쨌든 영화 마지막에 나온 퍼포먼스는 재미있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영화 자체의 점수까지는 깎고 싶지 않았는데 놀라운 일이 한번 더 일어났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나온 게일 역할 배우의 이름이 감독 이름과 똑같았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뱅크스……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나는 영화를 감상하기 전 영화의 모든 것을 다 조사해두는 타입보다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가 마음에 들었을 경우에 한하여 트리비아를 수집하는 타입에 가까워서 그걸 시리즈 두번째 영화까지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자기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서 그렇게 얼간이같은 역할로 나올 수가 있지? 그건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거나 자기가 영화 속에서 읊은 대사들에 별 유감이 없었던 것 아닌가……? 때문에 엘리자베스 뱅크스에 대한 실망감을 조금 유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품은 채로 <피치 퍼펙트 3>까지 본 후, 마침내 엘리자베스 뱅크스의 필모그래피를 뒤져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미녀 삼총사 3>도 연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가슴 속에서 뭔가 특별한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그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나서였다.
정확히는 그게 그의 말인 줄을 모른 채로, 또는 그의 이름을 까먹은 채로 인용한 적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그렇게 긴 이름도 아니고 ‘뱅크스’ 라는 성은 쉽게 잊을 만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의 두번째 장편소설 <마르타의 일>이 출간된 지 얼마 안 되어 어떤 팟캐스트에서 <마르타의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계속 여성 서사를 쓸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나왔고, 나는 대략 이렇게 대답했다. (팟캐스트 녹음 당시에는 내 기억보다 눌변이었을 테지만 기억나는 대로 쓰면 이렇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떤 여성 감독이 <미녀 삼총사>의 새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엄청 비난을 받았대요. 굳이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 필요도 없고 여성이 약간 상품화되는 경향도 있는 영화인데 뭐하러 만들었냐는 둥의 비난이었다고 해요. 근데 그 비판과 비난에 대해 감독님이 한 답변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007> 시리즈가 수백 편 만들어질 동안 그런 질문 듣는 거 본 적 있냐고. 여자들한테도 이런 게 하나 있을 만 하다고. 여성이 주인공인 오락성 있는 서사물이 수백 수천 편 만들어져도 괜찮다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제가 여성 서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그와 비슷해요.”
여성(들)이 주인공인 스파이물도 수천 편, SF도 수천 편, 어반 판타지도 수천 편, 역사물도 수천 편, 뮤지컬도 수천 편, 코미디도 수천 편 필요하다. 창작자는 비난을 감수하고 감상자는 비난을 유보하고 수천 수만 수억 수조의 여성서사물을 일단 만들고 감상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멋진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었구나……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로 약간 존경하던 사람이 바로, 방금까지 보던 영화에 나온 엄청 근사하게 생긴 주제에 멍청한 소리를 찍찍 내뱉던 캐릭터였다니. 존경할 만한 어떤 익명의 영화인과, 내 이상형에 가깝게 잘생쁜 배우와, 한숨이 나올 만큼 멍청한 캐릭터가 마침내 나의 의식 속에서 합체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녀 삼총사 3>까지 보는 사이 내 생일이 지났고 나는 그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단순히 만 31세가 되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든다. 이 이상 잘 설명할 자신은 없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박서련
“세번째 장편소설 <더 셜리 클럽>이 나왔습니다. <피치 퍼펙트> 시리즈에는 ‘제시카’와 ‘애슐리’라는 이름을 가진 캐릭터도 나오는데, 제 소설의 주인공 셜리에게 세련된 이름 옵션으로 ‘제시카’와 ‘브리트니’를 줬던 장면이 뒤늦게 조금 아쉽더라고요. 제시카와 애슐리라고 쓸 걸…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