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잦다. 장마가 길어도 너무 길다. 날씨의 영향을 유독 많이 받는 나는 비만 오면 나무늘보처럼 축 늘어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일에도 안간힘을 써야 한다. 비가 우울과 무기력의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음양오행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가 오는 일 역시 음과 양의 조화로 설명할 수 있다. 하늘은 양이고 땅과 바다는 음이다. 음과 양, 양과 음은 항상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땅과 바다에서 수증기가 생성되어 하늘로 올라가면, 하늘은 채워진 음만큼 양의 기운을 아래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기의 순환은 매 순간 계속되고 이를 통해 음과 양의 두 기운은 균형을 이룬다.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을 두고 음양의 조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은 사실상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이 되고, 그것이 다시 비의 형태로 내리는 이 거대한 자연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거스르기가 힘들 수밖에. 쏟아지는 비나 절절한 사랑이나…….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이라는 창작품을 생산해 내는 일은 음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 결과물은 양일지언정 그것을 쓰는 과정은 거의 대부분 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쓰기는 고독한 작업이다. 오롯이 혼자 쓸 수밖에 없고 그 책임 또한 소설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조용하고 사색적이며 고여 있는 무언가를 퍼내되 그 일조차도 대부분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이런 단어들로 미화하지 않더라도 마감 직전의 소설가 모습을 본다면 본능적으로 ‘음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소설가는 자신의 모든 음기를 쏟아내 한 권의 작품을 만든다. 그 한 권의 책이 양이지만 사실 고갈된 음기와 균형을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베스트셀러라도 된다면, 판권이라도 팔린다면 모르겠지만 그저 일반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몇 달 안가 잊히면 소설가는 끝내 음양의 조화와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나 같은 소설가는 곧잘 우울감에 빠지는 것이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바람이 분다는 핑계로, 그리고 너무 화창하다는 핑계로.
허진호 감독의 영화 <호우시절>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한자로는 ‘好雨時節’이라 쓰는데 이걸 해석하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가 된다. 두보는 봄에 내리는 비가 좋은 비라고 이야기한다. 최근에 우리나라를 강타한 지긋지긋한 장마는 여러 가지 이유로 좋은 비와는 거리가 멀다. 이 지독한 비가 남긴 수해의 현장을 TV로 보면서, 그리고 후덥지근한 날씨와 창문을 때려대는 폭우를 직접 경험하면서 음양의 조화가 어긋난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마치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된 오랜 연인을 보는 것만 같다.
소설을 쓰는 행위가 소설가 자신에게는 음과 양의 불균형을 가져올지 몰라도 그것이 책의 형태로 판매가 되어 독자에게 전달되면 새로운 음양의 조화가 생겨난다. 독자는 독서를 통해 양의 기운을 받게 되고 그것은 곧 내면의 음과 균형을 이루며 삶의 활력소로 변한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딱 맞는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좋은 비’를 만나는 일과 같은 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소설가에게는 한 가지 의무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재미있는 소설을 계속 써내는 것이다. 내 소설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느 때, 어느 순간에는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호우시절을 선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만 하면 된다. 사실상 그 희망을 통해 소설가는 음양의 조화에 가까워진다. 누군가가 내 작품을 읽고 즐거워하리라는 기대를 품는 것, 그것만큼 짜릿하고 행복한 일은 없다.
두보의 ‘춘야희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내리네.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소리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
들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
강 위에 뜬 배는 불빛만 비치네.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금관성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
- 춘야희우, 두보-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전건우
"오락가락하는 비처럼 마음의 수문도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하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