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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히 중대한 오작동

분류
파트너멤버
작성자
이산화
스페이스X의 유인우주선 '엔데버'가 승무원 두 명을 싣고서 하늘로 멋지게 날아가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국제우주정거장에 성공적으로 도킹했다는 소식도 들었고요. 2011년의 마지막 스페이스 셔틀 프로그램 이래 처음으로 실행된 미국의 유인 우주비행 임무입니다. 민간 기업에 의한 유인 우주비행으로는 세계 최초이고요. 역사적인 순간이었고, 당연히 저도 꽤나 두근거렸어요. 우주선 발사는 좀 본질적으로 두근거리는 일이잖아요. 우주 개발의 주요 순간들을 대부분 책으로만 접했고, 그래서 인류의 꿈과 노력을 집약해 쌓아올린 이 멋진 역사가 한동안 사실상의 정체 상태였음에 시무룩해하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움직임을 직접 보게 되니 기뻐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었습니다. 막 만세를 부르거나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기뻐했다는 건 아니고, 음, 적당히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왜 적당히만 기뻐했느냐고요? 글쎄요, 저도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최신 위업을 좀 더 순수하게 찬미할 수 있길 바랐는데, 그러기에는 상황이 영 뒷받쳐주질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우주선 발사 현장에 나가서 미국의 승리를 신나게 자화자찬하고 있는 동안 지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다들 알잖아요.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미네아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살해당했고, 이러한 미국 경찰의 인종차별적 폭력 진압 사례가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니고, 결국에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되어서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러는 동안 아직도 코로나바이러스 19 대유행은 해결되지가 않아서 미국 내 사망자 수는 10만 명을 넘겼고, 스페이스X의 설립자 엘론 머스크는 트위터에서 이게 별 일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중이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백인 남성 두 명이 바로 그 엘론 머스크 덕택에 우주공간으로 날아갔습니다. 마침 제가 온갖가지 부류의 혐오자들과 인터넷상의 거짓 정보 등등에 진저리를 내면서 '차라리 화성에서 사는 게 낫겠다'고 소리치고 있는 동안에요. 네, 저도 정말 더 기뻐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현재의 지구 중력과 대기권 아래에서는 기쁨을 일정 수치 이상으로 갖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지금 넷플릭스에는 마침 미국의 현재 우주개발 계획에 박수를 보내기보단 조금 비아냥거리는 듯한 드라마 시리즈 <스페이스 포스> 가 올라와 있지요. 최근에 1화를 슬쩍 보았는데, 트럼프 정권의 우주군 창설 계획을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내용이었지만 제게는 더욱 유서 깊은 레퍼런스 하나가 더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기상 환경을 들어 발사 연기를 주장하는 과학자와 정부 인사들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으니 발사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임자……이건 명백하게 챌린저 호 참사를 의식한 구도잖아요. 저는 1986년 1월 28일의 챌린저 호 발사를 생중계하던 당시 NASA 홍보담당관 스티브 네스빗의 목소리를 종종 생각합니다. 챌린저 호가 흰 연기를 뿜어내며 허공에서 산산조각냈을 때 네스빗은 이렇게 말했죠. "명백히 중대한 오작동이 발생했습니다(Obviously a major malfunction)." 충격적인 재난 순간에 걸맞지 않는 이 담담한 보고가 아마 네스빗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을 거예요. 실패의 결과가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저 그 꼴을 허망하게 지켜보면서 한 마디 중얼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경우도 생기는 법입니다.
백인 둘만 우주선에 태워줬다고 앞서서 짜증을 좀 냈습니다만, 환경주의자들은 우리 지구를 하나의 우주선처럼 생각하는 '우주선 지구'(Spaceship Earth) 비유를 오래도록 사용해 왔지요. 이 비유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가 우주공간을 여행하는 거대한 우주선의 승무원인 셈입니다. 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승무원들이 다른 승무원을 혐오하고, 위협하고, 죽이고, 시스템 전체가 절찬리에 망가져가는 중인 그런 우주선 말이에요. 요즘 들어서 저는 이따금씩 이 우주선 뒤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어딘가가 이미 폭발한 뒤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직은 대처할 시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백히 중대한 오작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할 때쯤엔, 과연 이 우주선이 몇 조각으로 쪼개져 있을까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산화
“SF 작가. <페이트/그랜드 오더>에 나온 보이저 서번트는 내가 먼저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