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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의 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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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멤버들의 7월 월간 안전가옥은 "2020년 상반기 나의 최애 캐릭터"라는 주제로 작성되었습니다. 안전가옥에서 일하는 운영멤버들이 2020년 상반기에 본 어떤 영화, TV쇼, 책, 만화, 다큐멘터리 등등에서 어떤 '최애캐'를 찾았는지 함께 살펴봐요 *대상 콘텐츠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헤이든이 본 콘텐츠

나의 눈부신 친구 TV 시리즈 HBO
출처: imdb
아주 우연히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왓챠플레이가 지난번 <체르노빌>부터 HBO 드라마를 단독 공개했는데, 또다시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HBO 드라마를 공개했다. 두 여인이 주인공인지 배너에는 두 명의 배우 얼굴이 박혀 있었다.
일단 두 소녀가 주인공이라면, 그들의 우정과 성장기를 담은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서사에 대해 복잡한 생각 없이 보게 마련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기 바로 얼마 전, 역시 HBO의 드라마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4부작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를 재미있게 봤고, 드라마 속에서 올리브로 분한 (내 최애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보며 행복해했던 터라, <나의 눈부신 친구>가 공개된 것도 조금은 반가웠다. 게다가 ‘나폴리’라는 지역적 배경이 흥미로웠다. 나폴리란 마피아의 도시가 아니던가. 영어권 나라가 아닌 이국적 풍광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든 데다 예고편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깔려 있었다.
그 음악은 영화음악 감독으로 유명한 막스 리히터가 (아주 흔하디흔하게 듣는) 비발디의 사계를 리컴포지션한 앨범 중 한 곡인 ‘Recomposed by Max Richer: Vivaldi, The Four Seasons - Spring 1’이다.
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두 소녀가 손을 잡고 뛰는 장면이 예고편 속에 삽입되어 있었다. ‘헝. 그렇담 봐야지.’하고 보기 시작한 것이 이 작품을 알게 된 계기였다.
원작 소설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으로, 네 권의 쪽수를 합하면 약 2,400쪽가량이 되는 두 주인공의 길고 긴 인생 이야기다. ‘인생이야기’라는 말 그대로 1950년대 소녀 적부터 중년이 되기까지 이탈리아 ‘나폴리’라는 거친 파도 속에서 여자로 살아남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드라마는 시즌 2까지 공개 되어 있고, 책은 4권까지 모두 출간되어 있어서 3권부터는 소설로 읽기 시작했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등장인물이 많고 그들끼리 얽히고설켜 있어서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줄여 보자면, 모범생 레누와 머리가 비상한 릴라가 폭력적인 도시, ‘나폴리’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주인공은 릴라와 레누라는 두 여자다. 그중 ‘릴라’는 올해 본 중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드라마를 보는 동안 이해하려고 애쓰게 만들었단 인물이라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 캐릭터다. 릴라에 대해 설명하려면 나폴리라는 도시 분위기를 설명해야 하는데, 앞서 썼듯이 나폴리는 이탈리아 안에서도 특수성을 지닌 도시다. 간단히 말하면 ‘카모라’라 불리는 마피아 조직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고, 북부 이탈리아보다 문화적-관습적으로 매우 보수적이었다. 특히 여성은 남성들에게 철저히 종속되어 있었고 여성에게 여러모로 폭력적인 환경이었다. 길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가문 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고리대금업자는 가차 없이 피를 보는 도시.
드라마는 중년의 작가가 된 ‘레누’가 오랜 친구인 ‘릴라’의 아들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으며 시작된다. 통화 내용은 릴라가 사라졌다는 것. 레누는 릴라의 아들에게 ‘릴라를 찾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곤 레누는 어떤 이유에선지 화가 나서 릴라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끝까지 해볼 거야.’라는 말과 함께. 그리곤 이 드라마의 화자가 되어 과거를 회상한다.
소녀 시절 레누와 릴라는 성격이 매우 다른 아이다. 레누는 내성적이고 성실한 모범생이고, 릴라는 머리가 명석하고 도발적이며 반항적인 소녀다. 역시 내성적인 레누는 뭐든 뛰어난 릴라를 언제나 좇게 된다.
두 소녀가 친구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도발적인 릴라가 어떤 사건을 만나면서부터다.
동네 남자아이 무리가 릴라를 향해 돌을 던지는데, 릴라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혼자서 그 남자아이들을 상대한다. 일 대 다수의 기울어진 싸움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레누가 용기를 내어 릴라에게 돌을 주워준다. 지지 않으려던 기세에도 불구하고 릴라는 돌에 맞아 쓰러진다.
이 작은 사건이 두 소녀를 맺어준다. 이런 구도는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반복, 변주되는데, 그런데도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어느 국면마다 릴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거나 예상할 수 없어서다. 릴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의뭉스럽다. 릴라는 릴라만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릴라는 이런 성격 탓에 언제나 공격과 비난, 이목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 그에 비해 레누는 대부분 침묵한다. 릴라는 언제나 행동하고, 레누는 망설이다가 릴라에 대한 질투와 사랑 때문에 한 발짝씩 움직인다.
그러다 두 사람의 삶이 다른 곳을 향하는데, 릴라는 생업전선에 뛰어들고, 레누는 학업을 이어간다. 레누가 비교적 평탄한 과정을 밟아가는 중에 릴라는 여성에게 결혼 결정권 조차 주어지지 않는 나폴리 분위기에 맞선다. 그렇다고 릴라가 세상 지식과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천재들은 주로 독학을 하지 않던가. 릴라는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거의 모조리 읽다시피하며 세상의 지식을 흡수하고 점점 견고한 릴라가 된다. 레누는 열등감과 자신감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지만 교육의 기회는 자연스럽게 계층 상승으로 이어져, 작가가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성공한다.
파시즘이 물러간 후 다가온 혼란,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 여파가 도달한 이탈리아의 시대 배경과 맞물리며, 릴라는 더욱더 굴곡진 길로 나아가는데 이런 배경이 릴라의 캐릭터를 더욱 구체화한다.
릴라의 저항심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보다는 저항하려는 대상(주로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가장 큰 수치와 실패를 안기는 쪽으로 작동한다. 레누를 비롯해 동네 사람들은 당장 그 수를 알아챌 수 없다. 소설을 읽는 모두가 레누의 시점을 따라 릴라의 마음을 ‘추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릴라의 다음 행보가 어디로 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여러 인물의 복잡하고도 미묘하게 얽힌 감정과 욕망의 그물망이 잘 짜여있다.
좋은 작품이 으레 그렇듯, 이 군상극은 어느 누구도 완벽히 나쁘거나, 완벽히 좋은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더욱이 미워하면 무섭게 미워하고, 사랑하면 뜨겁게 사랑하는 그 지역 사람들의 성미같은 것은 이야기의 흐름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작가는 레누에게는 고요한 야심을, 릴라에게는 탁월한 재능을 주었다. 올해 본 중 가장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이해하고 싶어서 애썼던 캐릭터, 나에겐 릴라였다. 어쩌면 이것이 ‘최애’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넌 나의 눈부신 친구야.”라는 중요한 대사를 릴라에게 주었던 것처럼, 작가 또한 릴라를 무척 사랑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어쨌거나 이 글을 쓰면서 릴라에 대한 마음이 커지는 것을 보면, 곱씹을수록 사랑하게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헤이든
"엘레나 페란테 슨생님 오래 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