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를 자주하는 편은 아니다. 게다가 물욕은 넘쳐나는 편. 이 두 가지 끔찍한 조합으로 인해 내 방은 언제나 정신없는 상태이다. 다행히도 집 밖에서는 항상 깔끔한 것을 선호하고 정리 정돈이 습관화 되어있어 어디가서 더럽다는 소리는 못들어봤다. 버릴건 버리고 자주 사용하는 물건은 가지런히 놓고 먼지 잘 닦아주고.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 집에서 하려면 유독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한다. 얼마 전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많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 자주보는 tvN의 예능 <신박한 정리>. 신애라를 주축으로 박나래 윤균상이 전문가와 함께 의뢰인의 집에 필요없는 물건을 버리고 공간을 재배치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아이를 키우는 집을 정리할 때는 남일처럼 봤는데 최근 방영한 오정연 편을 보면서는 마냥 재미있게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집에 들어오면 숨이 탁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내가 평소에 내 책상을 보면서 느끼는 기분과 같았다. 정리를 해야되긴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버려야될지 모르겠고 나도 모르게 자꾸 외면하게 되고 점점 쌓여가는 새로운 물건까지..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그래서 코로나19의 여파로 집에만 있게된 김에 나도 ‘신박한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맘잡고 청소를 할 때마다 꽤 많은 양의 물건을 버리는데 또 언제 이렇게 쌓이는건지 그 이유를 버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버렸던 물건 중 하나가 A4용지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과 4년간의 긴 재수 기간 동안 수업 자료와 필기 등으로 사용했던 용지를 여러 클리어 파일에 꽂아놓고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 클리어파일이 8개 이상이었으니까, 꽤 많은 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파일에 꽂아두지도 않은 A4뭉텅이가 책상 아래 보이지 않는 책장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것. 이건.. 내일 치울 예정이다.
어쨌거나 이번 기회로 전부 버렸다. 정말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사진으로 찍어서 남기라는 ‘신박한 정리’ 프로그램의 조언을 참고하며. 과거의 나는 이 많은 용지가 미래의 나에게 한 번 정도는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아뒀을 것이다. 계속 글을 쓴다는 전제 하에. 용지라는게 파일에 들어가 책장 깊숙한 곳에 꽂히면 잘 안보게 되는 법이다.
실제로도 버리기 전까지 한 번도 꺼내본적 없었지만. 한 곳에 모아둔 방대한 양의 용지를 보니 ‘나 그래도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입시에 실패했으니 늘 자책하기 바빴다. 항상 나를 따라다니던 패배의식과 열등감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던 그때의 흔적 앞에서나마 조금 흐릿해졌다. 최선을 다한 결과 앞에 자책이 무슨 도움이 되랴. 쌓아두고 버리지 못하던 과거와 함께 마음 한구석에 묵혀뒀던 감정도 같이 버리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이 물욕이 많은 편이다. 지나간 덕질의 흔적인 피규어가 아직도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고 걸어둘 곳이 없어 펼쳐본적 없는 브로마이드가 한구석에 쳐박혀있다.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직 고민중에 있다. 종이나 공책 같은 추억은 머리속에 남아있으니 미련없이 버릴 수 있었으나 신나게 사들였던 피규어의 가격을 생각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둘 수 밖에 없다. 중고로 팔려면 사려는 사람이 나타날때까지 기다려야하고..
신박한 정리에서 정리를 도와주는 전문가도 대단하지만 미련없이 집을 비우는 의뢰인의 결단력에도 경의를 표한다. 과연 성공적으로 미니멀리스트 하우스가 될 수 있을런지. 부탁해, 미래의 나..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최수진
"아빠방 서랍에서 20년도 넘은 아빠의 군번줄을 발견했을때,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