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슈퍼마켓이 사라진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왔습니다. 삼각김밥은 많은 청춘들의 주식이고, 밤낮없이 사는 이들에게 24시간 편의점은 무척 소중합니다. 최저임금 파트타이머의 일터이자, 김치부터 택배까지 일상에 필요한 거의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한 골목 건너 하나는 꼭 있으니 무엇보다 익숙하지만, 항상 그것도 24시간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편의점 앤솔로지는 2019 여름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의 수상작을 모은 수상작품집입니다. 다섯 편의 이야기 안에서 편의점은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었다가, 인연을 만나는 곳이었다가, 직장이었다가 미래였다가 주인공 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편의점을 두고 벌어지는 낯설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다섯 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의점》 앤솔로지
어디에나 있는 편의점에서 벌어진 어디에도 없던 다섯 편의 이야기
2019 여름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 수상 작품집
환하고 말끔히 정리된 매대. 24시간. 삼각김밥부터 섬유유연제까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는 공간 '편의점'의 문을 열고,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세계로 거침없이 나아간 다섯 이야기.
각 작품에서 편의점은 인연이 만들어지는 장소이자, 누군가에게는 직장이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 플랫폼이다.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24시간 존재하는 '편의점'을 소재로 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흔해서 도리어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을 새삼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지금 바로 《편의점》을 만나보려면?
목차
서문 _ 4p
창조와 비밀 _ 6p
카라마조프 헤븐 _ 60p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 _ 94p
마지막 퇴근은 손님들과 함께 _ 182p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 _ 246p
작가 후기 _ 288p
작품/작가 소개
창조와 비밀, 유기농볼셰비키
“난 여길 만드는 데도 참여했거든. 그래서 당신들의 교주가 쓴 교리책 같은 선동과 날조가 이 우주에 퍼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잘 들어. 진실을 알려 줄게. (…)사실, 지구는 조별 과제의 산물이야.”
“뭐?”
“정확히는, 미술대학 학부 1학년 1학기 공통 필수 파운데이션(기본) 과정에서 조원 구성이 랜덤으로 편성된 조별 과제의 산물이고.”
p. 21-22, <창조와 비밀>
줄거리
공모전 심사평
카라마조프 헤븐, 류연웅
이 시대의 종교는 오디션이고, 신은 캐릭터이며, 편의점은 교회가 될 것이다. 우린 물건이 아닌 느낌을 팔아야 한다. 사람들은 10원을 쓰는 데에도 의미가 있길 바라거든. 편의점을 통하여 캐릭터 오디션을 열자. (…) 최초 공개 당시 여론은 폭망이었다.
베댓: 삼성공화국에 이어 카라마조프공화국 만드는구나.
하지만 그딴 돈도 안 되는 주절거림은 101명의 카라마조프 프렌즈 캐릭터가 공개된 이후 깡그리 묻혔다. 카라마조프 월드를 보았니. 101명의 천사가 함께한~.
p. 68-69, <카라마조프 헤븐>
줄거리
공모전 심사평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 이아람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허리였다. 한라산 국립공원의 절반을 베고 누운 굴곡진 허리가 만들어졌고 다음 날에는 둥근 어깨가 생겨났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다리가, 그리고 머리가…. 7일째 되는 날에 그 ‘운석’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분명히 드러났다. 비정상적으로 작은 머리와 괴상하게 길고 뭉툭한 팔, 그리고 발가락이 없는 다리를 가진 웅크린 사람의 형태였다.
“저건 생명체예요.”
변화가 끝났을 때, 게스트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저건 돌이 아니라 외계에서 온 생명체라고. 우주에서 혜성을 타고 우리를 찾아온 방문자라고.
p. 145-146,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
줄거리
공모전 심사평
마지막 퇴근은 손님들과 함께, 정세호
“이제… 이제 저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습니다. 이 빌어먹을 편의점에 서서 물건을 팔고, 정리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요.”
“당신은 여기서 많은 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태곳적부터 모든 문명의 근간은 필요한 재화의 교환에서부터 태동했습니다. 당신은 만물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수행하는 이입니다.”
p. 239, <마지막 퇴근은 손님들과 함께>
줄거리
작가 소개: 정세호
공모전 심사평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 이산화 (초대작)
“어쩐지 편의점 신제품들 가끔 좀 이상하더라. 지난번에 요구르트 계란 샌드위치인가 뭔가는 먹어 보고 만든 게 맞나 싶었는데, 다 너네가 만드는 거였구나.”
“거기 들어간 게 좀 특수한 알인데, 하도 맛이 이상하니까 아예 더 이상하게 조리해서 얼버무려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거든요. 그렇게라도 시장 반응을 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데이터가 있어요. 한국은 그런 면에서 특히 실험에 용이하죠. 대만 카스테라도 그렇고 치즈 등갈비나 흑당도 그렇고, 음식이 한번에 확 유행했다가 싹 사라지잖아요? 땅은 좁고 인구는 바글거리는데 유행 교체 주기는 빠르고. 유전학 실험에 초파리 쓰듯이 쓰기 좋… 이거 하면 안 되는 말이었나요?”
p. 254,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
줄거리
《편의점》은 장르문학 애호가들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의 2019년 여름 수상작 네 편과 초대작 한 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수상작들은 모두 심사위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초대작은 앤솔로지에 경쾌한 매력을 더해 주었다. 중심 소재가 ‘편의점’이라는 사실이 제목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수록된 작품들의 제목을 보아도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책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섯 명의 작가들이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는 공간 ‘편의점’의 문을 열고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세계로 거침없이 나아간 까닭이다.
〈창조와 비밀〉(유기농볼셰비키)은 우주적인 농담으로 가득한 2인극이다. 외계인 창조주를 신봉하는 남자와 실제 창조자인 여자 사이의 쉴 새 없는 대화가 태연한 표정으로 이어져 큰 웃음을 유발한다. ‘지구는 외계 미술대학 조별 과제의 산물’이라는 황당한 전제를 토대로 거대한 세계를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작가의 솜씨가 인상적이다.
실직자의 가족을 다룬 정통 드라마로 출발한 〈카라마조프 헤븐〉(류연웅)은 짤막한 이야기들이 빠른 템포로 연결되는 가운데 스릴러와 판타지의 요소를 품고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질주한다. 결말에 이르러 독자는 이야기의 끝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어느 쪽을 택하든 가족 서사 특유의 아릿한 감정이 남는다.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이아람)는 외계 존재와의 첫 만남을 다룬 ‘퍼스트 콘택트’를 애틋하게 그려 낸 작품이다.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초록빛의 환상적인 생명체가 곳곳에 꿈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을 심어 놓았다. 거대하고 신비로운 존재와의 대면이라는 큼직한 사건이, 타인에 대한 몰이해에 따른 고통이라는 섬세한 갈등과 절묘하게 얽힌다.
〈마지막 퇴근은 손님들과 함께〉(정세호)는 한밤의 편의점에 나타난 낯선 손님들을 그린 수많은 응모작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편의점이라는 공간과 그곳을 지키는 인물의 존재감이 생생하고, 편의점의 특성을 이세계와 접속하는 장치로 흥미롭게 풀어낸 까닭이다. 실제로 편의점을 운영했던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기에 주인공의 마지막 퇴근이 전하는 여운이 묵직하다.
초대작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이산화)는 삼각김밥의 부작용으로부터 서울 시민을 구해야 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이현상청 소속 공무원의 활약상을 유쾌한 필치로 쫓는다. 능숙한 이야기꾼의 지휘 아래 익숙한 지명과 친숙한 대상이 미지의 세계를 덧입고, 선과 악·평범함과 기이함·성경 구절과 무속신앙의 주문이 발랄하게 섞인다. 개성이 심히 뚜렷한 인물들의 말맛이 일품이다.
편의점의 서비스만큼 다채로운 스펙트럼
편의점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먹거리를 보자면 간단한 간식부터 제법 고급스러운 식사까지 두루 갖추고 있고, 생활용품 코너에는 옷가지와 화장품과 필기구에 더하여 부의금 봉투까지 마련해 두었다. 뿐이랴. 현금을 찾을 수도 있고 택배 발송도 가능하다. 골목마다 매장이 있으니 편의점을 일터로 삼은 사람도 많다. ‘편순이’와 ‘편돌이’에게 있어 편의점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인생의 쓴맛을 체험하는 곳이다. 매출 압박에 시달리는 편의점주의 고단한 처지 또한 언론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편의점》 속의 편의점은 필연적으로 다채로운 모습을 띤다. 〈창조와 비밀〉의 편의점은 인연이 만들어지는 장소이자 지역 명물 빵을 비롯한 다양한 음식으로 소소한 풍요로움을 안겨 주는 곳이다. 그 음식에 문제가 생긴다면 점포 수만큼의 피해가 생기기에,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의 주인공 모린은 새벽부터 서울 곳곳을 누비며 팔리지 말아야 할 삼각김밥들을 회수한다.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 도입부의 편의점은 주인공 선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지만, 사건 전개에 따라 그 의미가 계속 달라진다. 선의 마음과 그가 편의점을 보는 시선의 변화가 작품 감상의 한 축이 된다. 〈마지막 퇴근은 손님들과 함께〉의 편의점 또한 주인공 우석의 직장이다. 편의점주인 우석은 손님 입장에서는 알 수 없었던 편의점의 그늘을 처절하도록 선명하게 드러낸다.
제목이 곧 작중 편의점의 상호인 〈카라마조프 헤븐〉의 경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 플랫폼형 편의점을 묘사하는데, 각종 캐릭터숍의 인기로 미루어 볼 때 현실화 가능성을 높게 점쳐 볼 만하다. 우리의 삶과 깊이 연결된 편의점의 미래는 곧 이 사회의 미래다. 약 40년에 걸쳐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의 편의점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짐작해 본다면, 우리의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기에 소외된 장소를 향하는 시선
편의점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지만, 편의점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그 이야기가 ‘장르소설’의 문법을 따라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지극히 생활 밀착형인 장소에 평범한 생활과는 동떨어진 사건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편의점》 수록작들은 그 산을 넘은 작품들이다.
〈마지막 퇴근은 손님들과 함께〉의 주인공인 편의점주 우석은 “인사에 대꾸도 없이 들어와 물건을 사고 나가기까지 한 마디 말도 없는”, “저를 사람으로 안 보는 사람들, 편의점의 부품 취급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토로한다. 곁에 당연한 듯 머무는 존재를 무심히 지나치는 태도란 세상 한구석을 쓰라리게 만든다.
그리하여 편의점을 둘러싼 이야기에 주목하는 일은 따뜻한 경험이 된다. 모두의 시야 안에 있기에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을 새삼 돌아보는 기회다. 심사 과정에서 편의점이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에 가점을 부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의 배경에 초라하게 머무르는 대신 중심에서 큰 흐름을 주도하는 편의점을 보며 편의점에 수없이 들르는 우리 자신도 그러하기를 소망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