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스릴러' 장르는 분명 여기저기서 많이 이야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어떤 장르인지 정의한 내용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로맨스의 하위 장르로 구분해야 할 것이고, 로맨스 장르의 규칙과 스릴러 장르의 규칙이 결합해야 하겠죠. 여기까지는 다들 동의하실 겁니다.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들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특히 이번 공모전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내가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가 로맨스 스릴러 장르에 포함될까?’ 하는 고민이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장르 자체가 학문적으로 깊게 연구된 분야는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로맨스 스릴러' 장르의 경계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장르의 경계가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그래서 오늘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로맨스 스릴러란 이런 것이다!’를 선언하는 일보다는, ‘안전가옥이 생각하는 로맨스 스릴러 장르의 특징'에 가까울 것입니다. 장르의 경계를 만들고 선언하는 일은 제가 아니라 연구자분들의 일일 테니까요.
로맨스 스릴러
연인이나 부부, 혹은 이에 준하는 로맨스 관계에서 벌어지는 스릴러
‘로맨스 스릴러' 장르는 일단은 로맨스의 하위 장르라고 봐야 마땅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사랑하는 관계, 즉 로맨스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죠. 저는 이 관계가 ‘로맨스 스릴러' 장르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특별한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맨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이나마)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데이트를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기도 하죠. (그래서 ‘로맨스 스릴러'는 ‘에로틱 스릴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우스 호러' 장르와 비교해 볼게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인 집에서, 가장 위험한 사건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공간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하우스 호러' 장르의 특징이었죠. ‘로맨스 스릴러' 장르도 이와 비슷해요. 옷을 벗고 함께 침대에 누울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관계(=로맨스 관계)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거예요. 그 위험을 짐작하는 순간부터 스릴러 장르의 규칙이 발동되죠. 불안하고, 긴장하게 만들어요. 이미 너무 가까운 사이기 때문에 쉽게 도망칠 수도 없죠. 동시에 상대의 비밀을 알아챌 기회도 많아져요. 로맨스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요. 낮과 밤, 우리의 일상을 거의 모두 공유하고 있는 관계니까요.
결국 ‘로맨스 스릴러' 장르는 ‘로맨스'와 ‘스릴러'의 효과적인 결합으로 탄생합니다. 그러니 서사적으로는 ‘스릴러' 장르의 특징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스릴러' 장르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 로맨스 관계를 사용하는 것이죠. 역시 ‘하우스 호러' 장르와 비슷해요. ‘호러' 장르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 ‘하우스'라는 공간을 활용하잖아요.
사랑의 완성은 부차적인 문제
로맨스 장르의 지배적인 특징, ‘로맨스 관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로맨스 스릴러’ 장르에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아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에요. 말 그대로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앞서 말씀드렸듯, ‘로맨스 스릴러' 장르의 서사는 ‘스릴러' 장르의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질문보다는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질문이 더 지배적으로 작용해요.
전통적인 로맨스 장르의 해피엔딩이라 하면, ‘결혼' ‘연인 관계의 공식화' ‘서로의 감정을 확인' 정도일 거예요.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들은 위와 같은 결말을 통해 성장하곤 하죠. 하지만 ‘로맨스 스릴러' 장르에서는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전통적인 로맨스 관계의 해피엔딩'을 겪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요. 로맨스 관계는 완성되었지만, 그 관계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죠. 그 위험은 조금씩 커지거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해서 결국 주인공을 위협하는 데에 이르러요.
‘로맨스 스릴러’ 장르의 서사
주인공은 누군가와 연인 관계이거나 부부 관계를 맺고 있어요.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수도 있고, 뜨거웠던 사랑이 식어가는 중일 수도 있죠. 주인공은 상대방에게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해요.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주인공에게만큼은 아주 중요한 것일 수도 있죠. 주인공은 그 ‘이상한 것'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행동하고, 그 행동은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넣어요. 주인공은 아래와 같은 갈등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Ⅰ.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Ⅱ. 너무나 가까운 관계(=로맨스 관계)로부터 시작된 위협이라 도망치기가 어려움
Ⅲ. 남들이(=사회의 시선)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
이후부터는 스릴러 장르의 특성을 충실히 따라가는 경우가 많아요. 위험은 점점 커지고, 주인공은 그 위험과 맞서 싸우거나 도망쳐야 하고, 성공하거나 실패하죠.
동시대의 문제를 다루기 좋은 장르
‘로맨스 스릴러' 장르는 어쩌면 ‘하우스 호러' 장르보다 동시대의 문제를 다루기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하며 살잖아요. 로맨스 관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겪어본 관계에요. 모태쏠로라 해도 짝사랑은 해봤을 것이고, 하다못해 로맨스 장르의 콘텐츠를 한 번쯤은 소비해 봤을 테니까요. 이건 정말 로맨스 장르의 강력한 힘이에요.
동시대의 모든 문제들은 로맨스 관계를 통해 다룰 수 있어요. 정치, 경제, 심지어 국가 안보 문제(ex : 강제규 감독 영화 <쉬리>)도 다룰 수 있어요. 전쟁도 다룰 수 있고, 난민 문제나 실업 문제도 다룰 수 있죠. 가깝게는 데이트 폭력 문제, 스토킹, 양극화, 불륜도 다룰 수 있어요. 동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다 보니, 동시대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이죠.
너의 모든 것 YOU
나를 찾아줘 Gone Girl
아가씨 The Handmaiden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너의 모든 것(YOU)> : 사이버 스토킹
데이비드 핀처 감독 영화, <나를 찾아줘> : 불륜, 가정(부부간) 폭력, 황색언론, 여성 혐오(misogyny) 등
박찬욱 감독 영화, <아가씨> : 계급, 동성애, 여성 혐오(misogyny) 등
위에 언급한 세 작품은, 다음 시간에 공개할 [안전가옥이 좋아하는 ‘로맨스 스릴러' 작품들]에서 다룰 작품들이에요. <너의 모든 것(YOU)>은 호평에 힘입어 시즌 2 제작이 확정되었고, 영화 <나를 찾아줘> <아가씨> 두 작품 모두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작품들이죠. 제가 최근에 감상한 ‘로맨스 스릴러' 중에서는 위의 세 작품들이 가장 좋았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나누겠습니다.
3줄 요약
연인이나 부부, 혹은 이에 준하는 로맨스 관계에서 벌어지는 스릴러.
사랑의 완성은 부차적 문제. ‘로맨스’는 관계, ‘스릴러’는 서사에 집중.
동시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수록 매력적인 장르.
글. Shin(김신) "부디 건강한 로맨스 관계 되시길..."
편집자. "'로맨스 스릴러'는 작품 속에서만 만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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