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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드소마> : 고약하게 뒤틀린 치유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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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
2018년을 돌아보던 어느 가벼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당신에게 올해의 영화는 무엇인가요?’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아리 에스터 감독의 <유전>을 꼽았습니다. 하우스 호러 장르의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기도 했지만, <유전>은 그보다 더 특별했습니다. 언론과 평론가들의 호평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호러 영화의 새로운 거장이 탄생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역시 호러 장르의 영화이고, 2019년 여름에 개봉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대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배우) 플로렌스 퓨의 캐스팅 소식까지 들었고, 저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스웨덴의 하지夏至 축제를 배경으로 하는 한낮의 호러 스릴러라니, 오늘(개봉일)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오전 7시 30분 영화를 예매해 놓고, 새벽 5시에 일어났습니다. 용인에서부터 차를 몰고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도착했죠. 호흡을 고르고, 극장으로 들어갔습니다. 146분의 러닝 타임이 끝나고, 으으…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극장을 나섰습니다. 비가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이상 눈부신 해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거든요.

미드소마

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 플로렌스 퓨, 잭 레이너, 윌 폴터, 윌리엄 잭슨 하퍼 등
개봉: 2019.07.11.
(주의) 최대한 조심하였으나, 스포일러에 예민하신 분들께는 불편한 글일 수 있습니다.

<미드소마>의 서사 1 : 공포체험 서사

숨이 막히도록 좋았던 약 15분의 오프닝을 지나고 나면, 영화는 익숙한 하이틴 호러 장르의 관습을 따라갑니다. 젊은이들 5명이 스웨덴으로 여행을 떠나요. 아름다운 숲과 자연, 그리고 눈부신 태양이 내리쬐는 곳에 이상한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젊은이들을 맞이합니다. 앞으로 9일 동안 축제가 열릴 것인데, 이는 아주 소중하고 아름다운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하네요. 자, 호러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전개 아닌가요? 이제 차례차례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고, 살아남은 젊은이들은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뒤에서 물색없이 웃고 있는 저 친구 왠지 마음이 가네요...

<미드소마>의 서사 2 : 치유와 성장의 서사

하지만 <미드소마>는 그렇게 만만한 영화가 아닙니다.

주인공 대니(플로렌스 퓨 분)는 가족을 잃은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어요. 이곳에서 진행되는 9일간의 축제는 신비롭고 기괴하고 때로는 끔찍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사건을 통과하는 주인공 대니가 점점 구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거예요. 대니에게 구원이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이겠죠. (벌써부터 스포일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더 자세히 말할 수가 없으니 결론만 이야기할게요. 영화 <미드소마>는 주인공 대니의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에요. 아리 에스터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이 영화는 가족을 잃은 한 여성이 혼자가 되고, 격리된 가족의 일원이 되는 내용이라고 보면 됩니다.”
정확해요. 분명히 정확한데,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인터뷰를 보면 감독이 나를 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여성이 혼자가 되고, 격리된 가족의 일원이 되는 이야기라. 여기에 뭐가 빠져 있냐면요, ‘어떻게'가 빠져 있어요. 그리고 <미드소마>는 그 ‘어떻게'를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묘사한다니까요.

치유의 서사가 맞긴 한데, 아주 고약하게 뒤틀린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지만 과거의 상처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이 어떠한 사건을 겪고 그 상처를 치유한다. ‘치유의 서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죠. <미드소마> 역시 위의 문장처럼 요약할 수 있어요. 문제는 ‘어떠한 사건'이 바로 9일간의 끔찍한 축제'라는 것이죠. 이상하잖아요. 보통 이런 사건을 겪으면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생기는 게 정상이죠. 기괴한 의식들을 행하고,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축제를 보고 트라우마가 치유된다고요?
네.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불쾌하고 끔찍했어요. 이 영화는 일단 길고(140분이 넘음), 어렵고(후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불쾌해요. 고어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그냥 징그러워서 불쾌한 수준이 아니에요. 서사 자체가, 주인공이 변화하는 모습 자체가 불쾌해요. 그러니 이 불쾌함은 100% 감독이 의도한 것이고, 의도는 성공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대니의 표정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 표정을 저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예요.
이런 불쾌한 서사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전작 <유전>의 서사와 닮아 있어요. 영화 <유전>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죠. 그 운명은 ‘가족'이자 ‘유전'이고, 악마 ‘파이몬'이에요. 주인공은 끝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결과적으로 악마 ‘파이몬'에게 굴복함으로써 구원을 얻죠. 호러의 옷을 입은 가족 드라마(?) <컨저링>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결말이에요.
“영화 <유전>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악마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 유전은 피할 수 없다. 조력자는 없고, 악마는 강력하다. 애니의 오빠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운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잔혹한 운명은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 결국은 운명의 승리, 파이몬의 승리다.”
<유전>은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서사처럼 모든 비극이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죠. 그래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고요. 이것도 불편하고 불쾌한 것은 사실이잖아요.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운명대로 되고 만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게다가 그것이 비극이라면 더욱 그렇죠. 운명에 이끌려 파멸하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런데 <미드소마>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요. 주인공은 운명에 지배당하지 않아요. 오히려 스스로 선택하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너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요. 벌써 불편한 분들 많으실 것 같은데.

기미신궁's 추천 포인트​

Q1. 많이 무섭나요?

네. 겁나 무서워요.. 상세히 말씀드리자면,
- 갑툭튀 없습니다. 깜짝 놀랄 일은 별로 없어요. - 고어 gore 장면 많습니다. 피가 많이 튀거나 흐르지는 않지만, 사람 혹은 동물의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시각적으로 끔찍합니다. (심지어 어둡지도 않은데) - 오컬트의 거장답게, 온갖 제의적 행위들이 등장합니다. 신비롭고 기괴한 분위기와 주인공이 받는 심리적 압박이 지속적으로 표현됩니다. (보는 내가 트라우마 올 정도) - 누드, 성행위 묘사 등의 수위가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높습니다.

Q2. 배경지식이 필요한가요? 필요하다면 어느 분야의 어느 정도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유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상징들(특히 그림)이 등장하는데요,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화(혹은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유전>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악마에 대한 이야기, 고대 그리스의 비극(특히 헤라클레스)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욱 즐겁게 즐기셨을 거예요. <미드소마> 역시 비슷할 것 같은데, 제 짧은 식견으로는 아직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겠네요. 후에 리뷰들이 더 많아지면 알 수 있겠죠.

임산부 / 노약자 / 비위 약하신 분 절대 보지 마세요.

아리 에스터 감독의 팬, 영화 <유전>의 팬 보세요. 보고 더 많은 이야기해 주세요.

호러 영화 좋아하는 플로리스트 강력 추천. 무조건 보세요. 영화 내내 꽃꽂이 대잔치...

그러고 보니 옷에도 꽃 자수가 가득이네요..

기미신궁's 생각

길고 어렵고, 불쾌한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

러닝타임 147분. 기생충(131분)보다 길어요. 체감 러닝타임은 더 깁니다. 일단 공간이 한정되어 있고, 시각적으로 새로운 자극이 꾸준히 등장하지 않아요. 영화의 리듬 자체가 빠르지 않습니다. 관객이 쉴 수 있는, 한숨 돌릴 수 있는 틈이 전혀 없어요. 소소하게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 거의 없고, 인물들의 심리적 압박을 지속적으로 함께 느껴야 해요.

어렵고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요. 기괴한 문양과 그림들이 끊임없이 보이고요. 그것이 지금까지의 오컬트 물, 그러니까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것은 아닌 듯해요. 그러니 이 상징들을 한 번에 이해하기란 (저로서는) 쉽지 않았어요. 물론 이 상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영화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에요. 이야기 진행에 꼭 필요한 것들은 친절하게 설명되고 있어요.

불쾌한

신체 훼손, 성행위, 누드 장면의 수위가 상당히 높습니다. 일단 시각적으로 불쾌하죠. 하지만 진짜 불쾌한 것은, <미드소마>의 이야기 그 자체에요. 9일간의 축제가 그냥 끔찍하기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불쾌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주인공 대니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지켜보세요. 특히 마지막 장면의 그 표정… <미드소마>의 불쾌함은 의도된 것으로 보여요. 영화가 실수(혹은 실패) 해서 불쾌한 것은 아니에요. 성공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 영화의 팬이라면 추천하고 싶어요. 아리 에스터 감독이 왜 호러 영화의 새로운 거장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어요. 특히 초반 15분의 오프닝 장면과, 마지막 10분 클라이맥스 장면은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자꾸 아저씨처럼 반복하지만, 언론과 평단의 극단적인 호평이 충분히 이해가 가더라니까요.
<유전>도 그랬지만, <미드소마>는 더욱 호러 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장르의 관습과 규범을 적당히 이용하고, 때로는 완전히 비틀어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죠. 악마나 귀신이 나와서, 혹은 그에 준하는 사람이 나와서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니에요. <미드소마>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짐작하셨겠지만 주인공인 대니에요.
극장을 나오면서, 으으… 신음소리를 냈어요. 제대로 당했구나 싶었어요. 이토록 고약하게 뒤틀린 치유의 서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름다운 것과 끔찍한 것을 대비시켜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 작품은 많았지만, 이 정도로 극단적일 줄은 몰랐죠. 앞서 언급한 아리 에스터 감독의 인터뷰는 이렇게 이어져요.
“이 영화는 가족을 잃은 한 여성이 혼자가 되고, 격리된 가족의 일원이 되는 내용이라고 보면 됩니다. 제가 헤어짐을 겪은 뒤 이 내용을 구상했는데, 그 헤어짐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었다기보다는 그때 겪었던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죠."
감독이 헤어짐을 통해 겪은 고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할 수 없어요. <미드소마>는 감독의 위악僞惡, 악독한 장난으로 가득한 영화에요. 불쾌한 영화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누군가는 이 이야기에서 깊은 위로를 받을 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들리는 음악은 The Sun Ain't Gonna Shine (Anymore)입니다. Frankie Valli 가 부른 버전이죠. 거 참, 이 사람(감독) 너무한다 싶으면서도 또 너무 슬프잖아….
글. Shin(김신) "굳이 한 줄로 감상평을 적으라면 이렇게 적겠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편집. Clare(최다솜) "저는 애저녁에 관람을 포기했는데.. 기미신궁을 읽고 나니 보고 싶다 싶은데.. 비위 약한 쫄보이므로 리뷰들만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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