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충 이거 미쳤구만?(p)
처음 『빵충 사육 준수 사항』 원고를 받아 읽기 시작한 날, 결국 잠을 포기했습니다. 한 챕터만 더, 한 챕터만 더 하다가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읽어버렸고, 집에서 형광펜까지 쳐가며 "아니 너무 재밌다 진짜"를 끄적이고 있었어요. 그리고 작가님께 바로 차기작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지요.
이야기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지만 원고에 반하는 순간이 매번 오는 건 아닙니다. 작가의 명성, 전작의 화제성과도 무관해요. 그래서 이 원고는 저에게도 특별했습니다.
음습하고 침침한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를 참 잘 쓰는 김혜영 작가님은 실제로는 밝고 해사한 분입니다. (제가 겪기로는요 ㅎㅎ) 작가님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유의 수줍어하는 미소가 있는데요, 그 미소도 매력적이지만 이어지는 말이 항상 제 취향저격입니다.
“제가 사실 작품마다 주인공을 다 죽이는 편이에요.
” “빵충이 징그럽나요? 저는 너무 귀엽고 맛있을 것 같은데….”
작가님과 첫 미팅에서 어두침침한 이야기도, 파국도, 구원 없는 끝에도 오히려 끌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이 원고가 저-기 밑바닥으로 내려갔다가 또 피칠갑으로 치닫는 것을 순화하거나 깎아내고 싶지 않았어요. 장점을 더 강화시킬 방법을 고민하는 것, 그것이 이 원고 프로듀싱과 편집에 있어 제가 정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답니다!
그런데 장점을 강화하려면, 먼저 이 이야기의 힘이 정확히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짚어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빵충’이라는 소재가 워낙 강렬하니까 소재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독자를 끝까지 끌고 가는 동력은 사실 주인공 정한이라는 인물에게서 나와야 하거든요. 빵충은 정한을 굴리는 판이고, 우리가 끝내 궁금해하는 건 그 판 위에서 정한이 무엇을 선택하느냐니까요.
그렇다면 지켜야 할 것도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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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정한이 한순간도 운전대를 놓지 않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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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달리는 세계의 규칙이 독자의 신뢰를 잃지 않게 할 것.
그 두 가지만 새지 않으면, 나머지는 원고가 알아서 달릴 거라 생각했어요.
정한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작가님과 스토리를 개발하며 주로 달았던 메모의 방향이 무엇인지 보니, "정한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이었어요.
(뒤에서 일부 변주하는 파트가 있습니다만) 이 소설은 정한의 1인칭 시점입니다. 독자는 정한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정한이 느끼는 만큼만 느껴요. 그러니 독자가 정한과 멀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 대목에서 소설은 동력을 잃습니다.
의외로 많이 드린 의견은 "덜어내자"는 쪽이었습니다. 작가님이 정한의 자책과 상념, 공포로 인한 신체화 현상을 정말 잘 쓰시거든요. 언뜻 들으면 정한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게 되니 독자와 정한과의 거리가 가까워질 것 같지만 실제론 그게 반복되니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오히려 멀어지는 기분이었지요.
사람이 금방 무언가에 익숙해지잖아요. 앞서 이미 여러 번 간접적으로 느껴온 감정이 유사한 구성으로 반복되니 왜인지 살짝 거리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대목을 꽤 덜어내자고 제안드렸어요. 감정을 더 많이 쓰는 게 아니라 아껴 쓰는 게, 작가님의 의도대로 독자가 느끼게 하는 방법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원고에 남겼던 편집 메모 중 일부
(잠깐, 여기서 다 안 읽고 이거 보는 분들 없으시죠?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조에서 가장 오래 이야기 나눈 것도 다른 측면에서의 ‘거리’ 문제였어요.
정한이 트럼펫을 불며 산에서 성체들에게 둘러싸이는 마지막 장면 기억 나시죠. 이게 등산으로 치면 꼭대기, 정상에 오른 셈이잖아요.
그런데 원래 버전에서는 이 장면 직전에 오는 48시간 전, 24시간 전 등의 시간 교차 파트에 오경혜, 안영돈, 강주원-정소율 부부 등 각 인물의 개인사만이 배치되어 있었어요. 주변 인물들의 개인사가 길게 이어지다 보니 그사이 정한의 존재감이 옅어질 수 있겠더라고요. 그렇다고 인물들의 개인사들을 걷어낼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개인사를 풀어둔 각 장 말미에 ‘정한의 현재’를 짧게 얹어보자고 제안드렸어요.
말하자면 48시간 전(오경혜 서사) - 정한의 현재 - 24시간 전(강주원 정소율 부부) - 정한의 현재
이런 식으로 "여러분, 정한이 까먹으면 안 됩니다!" 하는 자리를 만들어둔 거죠 ㅎㅎ
시간 구분(검정) - 주변 인물 개인사(회색) - 정한의 현재(미색).
본문 디자인으로도 좀 더 확실하게 구분 짓고 싶어 디자인 의뢰드렸던 부분
빵충 너 언제 나올래?
저는 원고가 어느 정도 구조가 잡힌 단계에서는, 한글 파일을 저희 오리지널 또는 쇼-트 라인업의 실제 판형대로 용지를 변경하여 얹어놓고 먼저 읽어봅니다. 원래 독자님들이 책을 펼쳤을 때 마주하는 실제 판형대로 북디자인을 하는 단계는 일반적으로 훨씬 뒤거든요.
본문 디자인이 완성되고 나면 오탈자나 맞춤법 같은 교정을 2~3번 정도 본 다음 데이터를 마무리해요. 수정 내역을 편집자가 표시하면, 디자이너가 이를 반영해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디자인이 된 뒤에 본문의 파트를 덜어내거나 문장을 대거 윤문하는 등의 수정은 진행하기엔 부담이 크지요.
그래서 원고 개발 단계에서 한글 ‘쪽 스타일’ 기능을 이용해 문서 용지를 설정하고,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서체와 행 수, 자간을 맞추어 간이로 조판을 해보는 셈입니다.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은 안전가옥 오리지널 시리즈로 128*188mm 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거든요.
이 원고를 개발하면서 고민했던 건 호흡이었어요. 정한이 트럼펫도, 딸기 농사도 잘 안 풀리면서 주인공의 삶과 실패를 꽤 오래 비추다 보니, 정작 빵충이 나타나는 타이밍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님께 빵충이 나오기까지의 타이밍을 대폭 줄여보자고 했을 때 받은 회신의 일부입니다. ㅎㅎ
작가님의 현재 심정이 매우매우 이해가 되었던 문장이지요.
그러니 저도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앞부분을 대폭 줄여 빵충 등장 시점을 앞당긴다
vs
이야기 구조상 유지한다
결론적으로는 저도 다시 생각하면서 이것이 스토리 구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일 수 있겠다라고 판단했습니다.
빵충이 나오기 전을 '본론에 못 들어간 서론'이라고 보면 분량이 방대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빵충과 함께 다음 막이 열리는' 구조라고 이해한다면 앞부분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남겨두어야 하는 별개의 파트가 되니까요.
그리고 앞부분에서 트럼펫을 불고, 딸기 농사를 실패하는 동안의 정한의 서사는 독자에게 정한의 선택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파트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의 프로듀서의 말에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위 판단을 두고 고민하던 때에 레퍼런스로 떠올린 게 영화 〈기생충〉이었어요.
〈기생충〉도 초반 한참은 기택네 가족이 반지하에서 피자 박스를 접고, 먹고살기 위해 꾀를 부리는 나날이 이어지지요. 그러다 기우가 박 사장네 과외를 맡고 점차 그 가족들이 박 사장네를 점거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계급의 공간으로 넘어가고, 또 이전에 일했던 가정부 문광이 지하실에 숨겨두었던 남편을 찾으러 들어와 지하실로 뛰어내려가면서 전혀 다른 영화가 시작됩니다.
장르가 전후로 완전히 뒤바뀌던 인터폰 신은 도무지 잊히지가 않는 것입니다
ㅡ 영화 <기생충> 스틸컷과 함께 TMI…
빵충도 그렇게 구조를 파악하며 읽으려고 했습니다. 정한의 실패가 쌓이는 '타바콬과 트럼펫', 딸기 농사가 무너지는 '킹짱베리의 몰락'은 빵충이 등장하기 전 밑바닥을 차곡차곡 다져두는 구간이에요. 그래야 빵충이라는 뜬금없는 동아줄이 등장하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다른 막으로 확 튀어 오르는구나 싶더라고요.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단순히 빵충의 타이밍을 앞당기자,가 아니라 앞부분에서 루즈해지거나 정한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여러 에피소드가 나열되는 부분만 리듬감을 고려해 덜어내면 되겠다. 이렇게요. 그렇게 최종 인쇄본에서 빵충은 67쪽, 소설 전체의 6분의 1쯤 되는 자리에서 처음 얼굴을 내밉니다.
작가님께 다시 드린 회신 중 일부입니다… 단숨에 밤새어 다 읽어버릴 정도로 애정하게 된 원고도 이렇게 문장과 파트별로 붙잡고 읽기 시작하면 생각할 포인트가 무한정 늘어나는 마법을 늘 겪고 있었어요.
저는 작가님이 잘 지어둔 세계를, 첫 번째 독자가 되어 그들의 눈으로 한 번 더 통과시켜보고 완성하기까지 안내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디테일하게 보려고 애쓰면 독자님들과 이야기의 거리가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거든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은 이 책을 재밌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대표님이 쓰라고 해서 기획 노트를 쓰기 시작했는데(ㅎㅎㅎ), 이렇게 여러분께 말을 건네다 보니 은근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거 있죠! 뵐 수만 있다면 함께 둘러앉아 두런두런 빵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어요.
오늘은 원고 개발 단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보았는데요. 다음 편에서는 편집과 디자인, 제작까지 만듦새에 관해 기획한 과정에 대해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럼 기획노트 2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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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지 (Marée) | 프로듀서
안전가옥에서 작가와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기획, 개발합니다.
좋은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게 독자에게 가닿을 방법을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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