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코로나 시대, 공포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안전가옥 앤솔로지 시리즈의 여덟 번째 주제를 ‘호러’로 삼은 이유다. 영화 투자배급사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과 함께한 공모전 결심에는 〈살인자의 기억법〉, 〈봉오동 전투〉를 연출한 원신연 감독이 참여해 더욱 치열한 논의를 펼쳤다. 우리 시대의 공포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인간에게 공포란 어떤 의미인지를 다채롭게 보여 주는 작품들을 선정했다.
몰래 엿본 옆집 사람의 비밀을 통해 침범에 대한 두려움을 들여다보는 〈습습 하〉, 인간을 습격하는 거대 쥐에 맞서 밀실에서 고군분투하는 가족을 그린 〈우리 안에〉, 증강현실 게임·현실의 사회생활·고전 소설 간의 교차점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추적하는 〈엔조이 시티전(傳〉), 스산한 규칙에 따라 운영되는 편의점의 씩씩한 야간 알바생이 겪은 험난한 하룻밤을 그린 〈편의점의 운영 원칙〉, 존재하지 말아야 할 학생에 대한 괴담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마음이 일으킨 비극으로 번지는 〈김민수(학부재학생)〉 등 다섯 편의 작품을 담았다.
지금 《호러》를 만나보려면?
목차
서문 · 4p
습습 하 · 6p
우리 안에 · 42p
엔조이 시티전(傳) · 104p
편의점의 운영 원칙 · 166p
김민수(학부재학생) · 206p
작가 후기 · 254p
작품/작가 소개
습습 하
오로지 나만이 이곳에서 썩지 않고 살아 있는 중입니다. 쓰레기들 사이에 있으니 나 또한 거대한 쓰레기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쓰레기 같은 년. 그 사람이 내게 말한 대로입니다. 볼품없는 이 생은 통장 잔고가 0이 되는 순간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p. 25 <습습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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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혜영
우리 안에
내가 저번에 공원에서 보았던 것을 이야기한다면, 상자를 갉아 먹고 초콜릿을 빼먹은 것이 쥐의 형태를 한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내는 분명 다시 불안정해지고 예민해질 것이다. 출산까지 아직 3개월이 남았다. 아직은 아내가 아무것도 몰랐으면, 불안할 일이 없었으면 한다.
p. 64 <우리 안에>
줄거리
작가 소개: 권하원
엔조이 시티전(傳)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랑 똑같은 경험을 한 유저는 아무도 없었어요. 제가 정체 모를 퀘스트를 수락해 버린 뒤로, 귀신이 나온다는 퀘스트의 모든 문제가 사라져 버린 거죠. 종료되기 직전의 게임을 살리기 위해 제가 자작극을 벌였다는 의견이 들끓었어요.
p. 123 <엔조이 시티전(傳)>
줄거리
작가 소개: 배예람
편의점의 운영 원칙
“이미 알고 왔겠지만 우리 점포는 전국에 있는 심령 스폿 중에서도 제일 흉악스러운 곳으로 유명해요. 해병대 출신이니, 유령의 집 알바 출신이니 하는 사람들 다 시켜 봤는데 하루 만에 줄행랑쳤어요. … 아무튼 본인이 겁 많다고 느끼면 다시 생각해 봐요.”
p. 170 〈편의점의 운영 원칙〉
줄거리
작가 소개: 경민선
김민수(학부재학생)
“그럼 이 김민수는 누구지? 출석부에는 김민수가 한 명밖에 없는데? 사회학과 아니에요?” “사회학과 맞는데요, 계정 하나로만 접속하고 있어요. 저는 저 김민수라는 분이 동명이인 학우분인 줄 알았는데요….” 온라인 강의실 내에 정적이 흘렀다. 교수도 입을 닫았고 진짜 김민수도 입을 닫았다.
p. 221 〈김민수(학부재학생)〉
줄거리
작가 소개: 이로아
생각보다 익숙한 장르, 호러에 바치는 헌사
호러라는 장르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무서운 이야기에 익숙하다. 괴담을 다루는 아동 도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꾸준히 사랑받는다. 여름만 되면 극장 개봉작부터 TV 예능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호러 요소가 강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주목을 받았다. 일부는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호러》는 안전가옥 앤솔로지 가운데 장르명을 제목으로 내건 첫 번째 책이다. 이 제목은 두려움으로 쾌감을 이끌어 내는 매력적인 장르에 대한 헌사이자, 공포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독자들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표지는 마치 호러라는 장르 그 자체 같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가오는 위협을 닮은 검은색과 붉은색은 안전한 경계란 없다는 듯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예측하지 못했던 위기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다가오는 섬뜩한 순간. 《호러》에 수록된 다섯 작품을 관통하는 장면이다.
무심한 침입자 뒤로 드리워진 세계의 그림자
〈습습 하〉는 “자신의 깊은 곳에 무언가가 들어오고 나갈 수 있음을” 모르는 자가 여성에게 함부로 입힌 피해를 이야기한다. 〈우리 안에〉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사는 작은 동물이어야 할 쥐가 인간의 집 안을 노리는 커다란 맹수로 돌변한다. 〈엔조이 시티전(傳)〉 속 게임에 나타난 귀신은 게임 내 세계뿐 아니라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편의점의 운영 원칙〉의 무대인 편의점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존재가 수시로 출몰하는 곳이다. 〈김민수(학부재학생)〉에 등장하는 김민수는 어느 과에도 존재하지 않는 학생인데 여러 강의실에 나타남으로써 소문을 몰고 다닌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작품들 속 위기는 이 세상을 비춘다. 우리는 남녀 간의 성적 문제가 일어날 때 여성이 더 큰 타격을 입는다는 사실을 이제 막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일자리가 부족한 사회의 청년들은 업무 환경이 매우 나쁜 일터에 자원해서 들어간다. 온라인 게임이나 온라인 강의 등을 통해 직접 만나지 않고도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이 늘어 가는데 그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또한 비대면 연결을 가능케 하는 통신망은 물리적 손상으로 순식간에 마비될 수 있다.
뒤틀린 거울에 비치는 통렬한 진실
《호러》 수록작들이 다루는 공포는 이처럼 이중으로 작용한다. 장르 특유의 짜릿함을 안기는 한편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반영된 이미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호러는 거울이다. 기괴함을 통해 보여 준다는 점에서는 뒤틀리거나 금이 가 있는 거울이다. 우리는 때로 왜곡된 상이 맺히는 거울을 굳이 응시해 그 안에만 비치는 무언가를 들여다본다.
누군가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그 사람의 일부를 드러내듯이 누군가의 두려움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두려움을 통해 상대방이 속한 세상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생존과 안녕을 방해하는 것, 그리하여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 그것 주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처지, 그러한 처지를 방치하는 사회 구조. 일그러지고 부서져 버린 반사경 너머에 그토록 날카로운 진실이 있다. 고통스러운 광경에 눈 돌리지 않은 독자들이 자연스레 받아 안는 통렬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