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서 2019년으로 막 넘어온 겨울이었습니다. 당시 운영멤버였던 메이와 한켠 작가님, 그리고 한켠 작가님의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추운 겨울을 뚫고 오신 독자 여러분이 함께 모여 백 년 전 경성 땅에서 살아가며 공부하고, 운동하고, 노동하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안전가옥과 한켠 작가님의 첫 만남은 그날의 작가 살롱과 같이 포근한 한겨울, 왠지 모르게 들뜬 마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2020년 여름. 그 겨울과는 날씨도, 우리의 일상도, 남과 북의 관계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날 함께 나눈 이야기들, 공부하고, 운동하고, 사랑하고, 노동하는 여성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1930년대 경성에서 2020년대 한국으로 날리는 슬프도록 기나긴 롱-패쓰.
안전가옥의 세 번째 쇼-트,
한켠 작가의 《까라!》를 소개합니다.
2020년의 골네트를 흔드는 1930년대의 롱-패쓰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자 한켠 작가의 단편집이다. 수록작들의 배경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30년대 중반의 경성인데, 이채롭게도 일제의 만행과 독립운동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누렸던 모종의 낭만 또한 강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두가 존재했던 시대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경성과 평양에서 축구 팀을 꾸리며 사랑을 이어 가는 두 여학생의 사연이 편지와 일기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전개되는 <까라!>, 자신에게 오는 환자를 무조건 살리는 뱀파이어 의사 ‘조이’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한 좀비 ‘가이’의 삶이 시적인 언어로 담겨 있는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등 두 작품을 수록하였다.
<까라!>는 1930년대 경성에서 치마를 바지로 꿰매 입고 고무신을 발에 꽉 끼어 신고 가위를 들어 머리를 자른 여자들이 2020년대 한국으로 보내는 슬프도록 기나긴 롱패쓰이다.
롱패쓰를 받았다면 꼴을 넣고 이겨 경기를 끝내야지 미래로 다시 넘겨서는 안 된다. 어둔 방을 밝히고 승리하기 위해, 그 밝은 승리를 미래에 전하기 위해, 한켠이라는 소중한 작가를 경유하여 경성에서 날아든 구호를 나의 자매들과 함께 외쳐 본다. 까라!
김혼비(작가)
<까라!>의 좋은 점은 시대적인 은유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축구를 문자 그대로의 축구로 묘사했다는 데 있다.
때론 생소한 근육통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살아 있음의 확실성이 있다. 흙먼지와 땀으로 뒤범벅된 레드비로드 멤버들에게 축구란 몸으로 경험하는 자유의 순간이지 않았을까. 그런 경험을 했던 그들이 그 전의 시간으로 얌전히 돌아가 순응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마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할 많은 독자들이 그러하듯.
위근우(기자)
지금 바로 《까라!》를 만나보려면?
경계를 넘는 사랑, 세상을 넘는 열망
<까라!>와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는 사랑 이야기다. 여타 연애담과 다른 점이라면, 경계를 훌쩍 넘어선 이들의 사연이라는 것이다. <까라!>의 경성 여학생 경희는 평양에서 온 언니 정월과 사랑에 빠진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의 뱀파이어 여의사 조이는 자신이 좀비로 되살린 청년 가이에게 애정을 품는다. 경희는 성별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조이도 종족 차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보잘것없는 경계다.
이들의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경희는 자신이 다니는 여학교에 축구 구락부를 만든다. 정월이 그러자고 제안해서다. ‘여자에게 어울리는 운동’을 하라는 선생님의 만류도, 훈련이 너무 힘들다는 친구들의 불평도 경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젠가 정월의 팀과 한 경기장에서 뛸 수만 있다면 견디지 못할 시련이 없다. 조이는 일제의 생체 실험 계획을 파헤치는 데 혈안이 된다. 조선인도, 아예 인간도 아닌 그가 위험한 비밀을 굳이 파고드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일제를 위하느니 목숨을 버리겠다는 가이를 살리려면 그 실험의 전말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멀다고 하면 안 될 이야기
거침없이 선을 넘는 주인공들은 역설적으로 굴레에 갇혀 있다. 경희는 선술집에서 유부남들에게 한참 희롱당한 날, 일기장에 “조선 여자는 조선 남자의 식민지다.”라는 문장을 적는다. 친선경기 상대로 만난 일본 여학생을 끝까지 미워하지 못한 까닭도 여성이 겪는 어려움이 국적 불문임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조이는 인간 역사에 가로막힌다. 영원하지도 못할 제국의 권력 따위가 너무도 많은 사람의 생사를 가른다. 뱀파이어인 자신이 괴물로서 엄연히 존재하건만 인간이 왜 다른 인간에게 괴물 노릇을 하는지, 조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경희와 조이가 한계에 부딪혔던 날들로부터 80여 년이 흘렀다. 우리는 <까라!>와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를 옛이야기라며 가볍게 넘길 수 있을까. 여성에 대한 차별은 아직 엄연히 남아 있다.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이들과 포기한 이들의 대립도 여전하다. 1930년대의 벗들과 우리의 경험이, 생각이, 꿈꾸는 미래가 서로 가깝다. 그러니 멀다고 하면 안 될 일이다. 연장전 승부차기에 이르기까지 끝을 말하지 않는 단단한 영혼들을 만나러 가자. 속 깊은 이야기들이 선선히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목차
까라! _ 6p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_ 130p
추천글 _ 186p
작가의 말 _ 190p
프로듀서의 말 _ 196p
줄거리
까라!
1935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학 차 상경한 경희는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축구 경기를 보다 평양에서 온 정월을 만난다. 자존감 높고 당당한 정월에게 매료된 경희는 그와 편지로 교류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다니는 여학교에 축구단을 결성한다. 역시 평양에서 여학생 축구단을 만든 정월과 함께 경기할 날을 꿈꾸는 경희의 앞을 정월 아버지의 혼인 강요, 여성 축구단에 대한 편견,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속속 가로막는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서대문형무소 근방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뱀파이어 의사 조이는 스스로 혀를 끊어 말하지 못하는 환자를 받는다. 환자는 자신이 일제에게 투항하지 못하도록 죽여 달라 간청하지만, 조이의 일은 오로지 살리는 것이다. 환자 가이는 좀비로나마 새 생명을 얻었음에도 인간을 먹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다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아무 죄도 없는 네가 왜 죽어야 하느냐는 조이의 외침 너머로 가이가 형무소에 갇히기까지의 사연이 밝혀진다.
책 속으로
서로 상대 선수를 까라고 했지만 속마음으로는 누구를 까고픈지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선수들은 뽈을 왜놈 대가리 차듯 뻥뻥 차 댔다. 조선 사람은 만세를 진압하면 <아리랑>을 부르고 검열을 당하면 “까라!”를 외친다.
p18 <까라!>
“그런데 왜 하필 축구니. 여자에게 축구는 어울리지 않는단다.”
“다리가 있으면 축구할 수 있구요. 여자가 애두 낳구 총두 쏘는데 축구라구 못 하겠어요. 여자에게 어울리는 운동이 뭐 따루 있나요.”
p44 <까라!>
막순은 치마를 걷어 아비에게 맞아 생긴 흉터를 보여 주고 나도 굵고 휜 다리를 내보였답니다.
“다리야 잘 뛰고 잘 차고 잘 까면 그만이지 생김새가 무슨 상관이람.”
... 영선이 말로는 근육이 미세하게 찢어졌다가 붙으면서 커진다 하지요. 언니, 언니의 답장이 하루 늦어지면 내 심장에 미세하게 금이 가고 답장을 읽으면 벌어졌던 틈이 다시 붙어요. 그래서 요즘 달릴 때 숨이 덜 차나 보아요.
p66 <까라!>
“나는 산 사람은 물지 않는다. 그러면 물린 사람이 나 같은 괴물이 되니까. 나는 이미 몸 밖으로 흘러나온 피만을 마신다. 너도 그리 하여라.”
‘나의 단식은 투쟁입니다. 그들이 나를 괴물로 만든다 해도 나는 누구도 해하지 않고 사람으로 죽겠다는. 나를 존중한다면, 나를 죽여 주십시오.’
p136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간절히 우주를 상상했습니다. 취조실의 의자가 우주선의 좌석이 되고 족쇄와 차꼬가 우주복이 됩니다. ... 외계인은 그들의 언어로 말을 겁니다. 지구인의 귀에는 욕설과 고함처럼 들립니다. 나도 그들의 언어로 신호를 보냅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비명과 신음처럼 들리겠지요.
p143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작가 소개
한켠
언제나 삶에 손톱만 한 낭만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 산책과 산들바람과 작고 보드랍고 말랑하고 달콤한 것들을 좋아한다. 방랑과 태풍과 독주와 날카롭고 단단하고 씁쓸한 것들을 사랑한다. 어둠과 그림자 와 그 사이에 한 줄기 새어 나오는 빛을 보는 눈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