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 <1984>
역사는 단지 지나간 것일까요? 우리의 바꿀 수 없는 역사, 예를 들어 격동의 한반도라고 흔히 표현하는 지난 백 년 동안 우리가 걸어온 길은 정해진 운명이었을까요? 우리 앞에 있었던 수많은 역사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결국 발견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사건과 참담한 역사적 진실뿐일까요?
계속 질문을 던져봅니다. 격동의 백 년 동안 일어난 1919년 3·1절 만세운동이 만약 평화운동이 아니라 무장봉기 운동이었다면? 1945년에 광복군이 원래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1950년 6.25에 전쟁이 없었다면? 혹자들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행위만큼 무의미한 건 없다고 할지 모릅니다.
2018 겨울 안전가옥 원천 스토리 공모전의 주제는 ‘대체 역사물’입니다. 공모전 요강에 몇 가지 조건이 적혀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대체역사물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다른 결과를 낳았다면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가정하는 장르
대체역사물의 필수 요소
1. 역사의 분기점
2. 실제 역사와는 다른 역사의 변화
3. 그 변화에 따른 파급 효과에 대한 (과학적) 조사 혹은 (이야기적) 증명
대체역사물은 주로 소설에서 발전했고, SF소설 또는 역사소설의 하위분류로 나눠지기도 합니다. 대체역사물은 주로 우리가 알던 실제 역사와 다르게 진행되는 역사를 보여주면서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사회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주의할 점
1. 가상 역사와 대체 역사의 혼동
가상 역사(Virtual History)는 기록된 실제의 역사와 충돌하지 않는 가상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 역사의 분기점이 발생하여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분기점 안에서 여러 가상의 사건들이 발생하지만 결국 우리가 아는 실제의 역사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죠.
예를 들어 2011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보면 한글을 창제하려는 이도(세종)와 이를 막으려는 '밀본'이란 조직이 여러 대결을 펼치고, 급박한 사건이 펼쳐집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세종대왕의 한글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창제됩니다. 이게 가상 역사입니다. 흔히 말하는 팩션이라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대체역사물(Alternate History)이라면 밀본의 계획이 성공하고 세종대왕은 결국 한글 창제에 실패한 후 조선의 변화 모습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한글이 없는 조선, 대한민국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대체역사는 새로운 한글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죠.
2. 시간 여행은 불가능
시간 여행, 타임리프(슬립)는 분명 대체역사 장르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분기점에 현재나 미래의 인물이 아주 손쉽게 혹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과거로 훌쩍 가버려서 역사를 바꾸는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받고자 합니다. 이번 공모전에서는 ‘역사의 분기점’이 왜 바뀌고, 어떻게 변화했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느냐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세 가지, 참고할 만한 작품
1. 영국 히스토리 채널 페이크 다큐멘터리 <대 화성인 전쟁 The Great Martian War (1913-1917)>
지금으로부터 거의 백 년 전, 유럽 대륙에는 참혹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북부 프랑스 평야에서는 그 이전 모든 전쟁보다 더 처참한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4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유럽 전역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소개말로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죠.
"모든 역사가들이 입을 모아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말하는 '대 화성인 전쟁'의 100주년을 맞이하여 저희 히스토리 채널은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4년이라는 세월이 어떻게 인류를 영원히 바꾸게 되었는지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대체역사물 레퍼런스 1. <대 화성인 전쟁 The Great Martian War> 캡처 이미지
<대 화성인 전쟁>은 2013년 영국에서 제작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19화로 구성된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이자, 실제 역사에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을 외계인과의 우주대전으로 가상하여 풀어낸 대체역사물입니다.
역사대로라면 1914년, 전쟁이라는 풍선이 부풀 대로 부풀어 올라 마침내 터지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국의 히스토리 채널은 1913년, 화성으로부터 출발한 정체불명의 빛이 독일의 어느 숲에서 폭발함으로써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는 것으로 새로운 역사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폭발이 생겼을 때 대부분 유럽인들은 '독일이 마침내 일을 저질렀구나' 싶었지만, 오히려 이 세계에서 독일은 피해자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숲을 수색하던 독일 군대는 모두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대부분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시청자는 목격하게 되죠. 거대한 세 개의 다리를 가진 외계 생명체와 기계를 말입니다.
※ <대 화성인 전쟁>의 하이라이트 편집 영상입니다.
대체역사물 레퍼런스 1. <대 화성인 전쟁 The Great Martian War> 하이라이트 편집 영상
2. 키스 로버츠, 책 <파반 Pavane (1968)>
대체역사물은 대개 세 가지 유형 중 하나입니다.
1) 역사적 분기점에서 현재와는 다른 과학 기술과 사회 발달을 다루며 SF의 전통적인 틀에 충실한 이야기
ex. 책 <쌀과 소금의 시대>
2) 일종의 평행 우주처럼 현실의 물리 법칙과 다른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판타지적인 성격이 강한 이야기
ex. <테메레르>시리즈
3) SF나 판타지적 재미보다 정치사회적 관심이 더 두드러지는 이야기
ex. <비명을 찾아서>, <유대인 경찰연합>
그런데 <파반>은 세 가지 유형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대체역사물 레퍼런스 2. <파반 Pavane>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강 이렇습니다. <파반>의 시대적 배경은 20세기 초반 영국입니다. 가톨릭의 과학 기술 탄압으로 (열차가 아니라) 증기 트럭이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길 위로 다니며 물자를 나릅니다. 나비처럼 돛을 단 소형차나 일종의 봉화대와 비슷한 원거리 통신 시스템이 존재하고요. 그 사이로 고대 영국의 다신교적 신앙과 마법이 환상처럼 남아 있습니다. 교황청의 지배와 착취에 대해 왕과 귀족, 백성의 불만이 쌓여 있는, 낯설면서도 친숙한 공간입니다.
여섯 개의 소절, 단편 분량의 이야기가 서로 섬세하게 이어지며 이 새로운 역사를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3. 필립 K. 딕, <높은 성의 사나이 The man in the high castle (1962)>
어쩌면 한국인들에게는 불편한 내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이 미국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죠. 흔히 대체역사 소설의 최고봉으로 선 꼽히는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는 ‘만약’이라는 질문에 가장 충실하게 섬뜩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작품일 것입니다.
대체역사물 레퍼런스 3. <높은 성의 사나이>
최근 리들리 스콧 감독이 아마존과 손을 잡고 드라마화했고, 곧 시즌 3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 <높은 성의 사나이>의 트레일러 영상입니다.
The Man in the High Castle Season 1 - Official Trailer: What If?
<2018 겨울 안전가옥 원천 스토리 공모전 : 대체역사물>에 참여하고자 하는 창작자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작성해봤습니다. 혹시 이 글이 주제를 더 어렵거나 까다롭게 느끼게끔 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듭니다. 다 알아서 창작해주실 텐데 괜한 노파심에 쓸데없는 말을 덧붙인 건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부디 쉽게 생각해주세요.
혹시 ‘만약 이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아주 조금이라도 해보셨다면 그걸 아주 조금만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 이상은 안전가옥이 함께 할 테니까요.
글. Teo(윤성훈) "본격 설레발 대체역사물을 쓰고 있겠습니다. '만약 너무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시면 어떻게 될까?'"
편집. May(김미루) "성지순례 왔습니다. 여기가 그렇게 용하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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