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rch
🕵

코지 미스터리란 무엇인가? by decca

작성자
decca
주제
코지미스터리
추천작
소설
먼저, 이 글 또한 장르를 정의하는 다른 글들과 비슷하게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코지 미스터리(cozy, cozies, 이하 코지)’ 역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미스터리의 서브 장르입니다. 게다가 범죄가 필수 요소인 장르에 ‘안락함’이라니, (굳이 우리말로 풀자면 ‘안락물’ 정도 될까요?) 그 명칭마저 왠지 이율배반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코지’는 미스터리 장르의 다양한 서브 장르 중 ‘스릴러’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상업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지금 이 시간에도 ‘코지’의 카테고리에는 차곡차곡 새로운 시리즈와 후속 작품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소비자와 창작자를 대상으로, 애매모호하지만 인기 높은 이 서브 장르의 직관적 이해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듯 유한한 ‘코지’의 둘레를 조금 더 좁혀보도록 하죠.

1. Uncomfortable (불편한)

‘코지’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은, 미스터리 장르 내에서 ‘코지’가 아닌 것들을 제외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비열한 거리를 묵묵히 걷는 탐정이 등장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는 어떨까요. 추악한 사회의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범죄를 다루는 제임스 엘로이의 누아르도 있죠. 연쇄 살인범을 추적하는 토머스 해리스의 사이코 스릴러는? 회색 지대에서 누구도 쉽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은?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범죄로 드러내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사회파나, 탐미적이고 선정적인 범죄를 극한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시마다 소지의 신본격 미스터리도 있겠죠.
이들 스타일은 ‘코지’와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 ‘불편한’ 서브 장르들입니다. (물론! 이런 서브 장르들 자체가 불편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들 스타일의 등장인물과 사회적 배경을 관통하는 핵심은 부조리와 타락, 속임수, 선정적인 범죄죠. 당연히 이 서브 장르들은 ‘코지’의 범주 안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누아르’의 작가가 비관론자라면, ‘코지’의 작가는 낙관론자입니다. ‘코지’의 세계관은 희망을 믿는 낙관주의에 가깝죠. ‘코지’ 속에서 일어난 범죄는 균형 잡힌 아늑한 세계에 생겨난 지저분한 얼룩 같은 것입니다. 여기 상식적이고 건전한 탐정이 등장해 논리라는 도구로 그 얼룩을 제거합니다. 질서와 균형은 곧 회복되고 다시 아늑한 세계로 돌아가죠.
어떻게 보면 ‘코지’의 이런 세계관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입니다. 그저 ‘좋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니까요. 줄리언 시먼스는 이를 ‘동화의 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그리고, 미스터리 장르의 역사를 아는 분이라면 이 세계가 매우 익숙하게 느껴질 겁니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권영주, 북폴리오
움직이는 손가락, 애거사 크리스티, 권도희, 황금가지

2. 살아남고 싶은 고전 미스터리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대전을 전후한 시기, 미스터리의 황금기라 불리던 그 시기에, 영국 미스터리는 너무나도 발전한 나머지 점점 ‘동화’ 같아졌습니다. 체제의 안정, 질서 유지를 바라는 장르 특유의 보수성과 맞물려 이런 분위기는 더 심해졌죠. 세계는 전쟁에 휩쓸려 극도로 혼란스럽고 급격한 변화로 꿈틀대는데, 정작 고전 미스터리 안에서는 계급사회가 너무나도 익숙한 귀족들이 장원에 모여 알리바이나 떠들고 있었죠.
하드보일드 작가들은 특히 이 지점을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급격하게 발전하는 미국을 중심으로 범죄를 얘기하는 새로운 방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죠. 이는 시대적 요구이자 필연이었습니다.
미스터리 장르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지닌 범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범죄를 다루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즉 전통적인 미스터리에서 누가 범인인지, 그 범인이 어떤 기발한 트릭을 사용했는지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범죄의 의미, 범죄자의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전통적인 미스터리는 현재 ‘범죄소설’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는 사회와 밀착해 변화하는 미스터리 장르 고유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고전 미스터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아늑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작가와 독자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코지’는 살아남고 싶은 고전 미스터리의 한 형태입니다. ‘코지’라는 명칭 자체도 황금기 여성 작가의 미스터리 스타일 (애거사 크리스티나 도로시 세이어스, 나이오 마시 같은 작가들)이 현대화되면서 달라붙은 명칭입니다.
지금이 1920~1940년대가 아님에도 ‘동화 세계’의 ‘코지’가 상업적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작가들이 현실에 잘 적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달라진 시대를 간과하지 않았고 독자들이 바라는 낙천적인 미스터리의 세계관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했죠. ‘코지’가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하나의 거대한 카테고리로 발전해가면서, 여러 가지 규칙들이 덧붙게 됐습니다. 이 규칙들이 각각 동심원을 그리며 저마다 ‘코지’의 영역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죠.
험담꾼의 죽음, M. C. 비턴, 지여울, 현대문학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 미카미 앤, 최고은, 디앤씨북스

3. ‘코지’의 일반적인 규칙들

미국에 ‘맬리스 도메스틱(malice domestic)’이라는 비영리 재단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같은 이름의 컨벤션을 매년 개최하고 ‘애거사 상(Agatha Awards)’도 수여하죠. 맬리스 도메스틱에서 다루는 장르의 기본 요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으로 가장 잘 대변되는 전통적인 미스터리, 노골적인 성행위나 과도한 폭력성이 없는 넓은 개념의 미스터리”

‘코지’의 규칙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일단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있더라도 전체적인 분위기에 어울리게 순화하여야 하죠. 목 자르고 시체를 바꾸거나, 피해자를 잔혹하게 고문하거나, 김전일 식(式)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수십 년 묵은 강력한 원한’은 가능한 한 피해주시는 게 좋겠네요.
선정성과 폭력성이 약하니, 사건 자체는 잔인한 본성이 아니라 주로 ‘관계의 문제’에 의해 발생합니다. 사건이 주로 ‘관계의 문제’라면 탐정 역할을 맡은 이가 전체를 파악하기 쉽도록 조금 작은 공간이 좋겠네요. ‘코지’의 사건은 대개 작은 지역에서 발생합니다. 용의자는 거의 다 익숙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문과 뒷담화에 굶주린 듯한 등장인물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지랖이 넓은 이들이 탐정을 (본의 아니게) 돕죠.
탐정 역할을 맡은 이들은 도로시 세이어스의 피터 윔지 경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의 후예들이에요. 대부분 범죄 전문가들이 아닙니다. 건전하고 상식적이며 논리적이지만 아마추어가 많죠. 이들에게는 정부 기관에 연결된 친구들이 한 명씩 있습니다. 애인도 좋고, 여성이라면 남편이나 남편의 절친도 좋고요. 현대 사회에서 범죄 수사는 아마추어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코지’의 작가들은 이들을 이용해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을 바로잡죠.
‘코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데, 아마추어 탐정들은 보통 다른 직업이나 전문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리사나 숙박업소 주인이기도 하고 정원사, 사서, 서점 주인, 사서, 꽃집, 선생님, 제빵사, 바느질의 대가, 새 관찰자, 소믈리에, 바리스타, 심지어 웨딩 플래너도 있죠.
탐정에게 이런 직업을 장착(?) 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요. 탐정이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누군가 계속 찾아온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코지’의 스케일에 잘 어울리는 설정이죠. 직업에 귀천도 성별도 없겠지만, 대부분 ‘코지’의 주요 독자층인 여성들에게 익숙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시리즈로 발전할 수 있도록 안배한, 고민이 깃든 상업적인 고려죠.
쓸데없는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코지’는 어디까지나 미스터리입니다. 메인 플롯은 고전적인 미스터리 구조와 일치하죠. 다른 서브 장르에 비해 더 많은 서브플롯의 변주가 가능하지만(예를 들어 로맨스 같은), 메인 플롯 자체가 튼튼해야 합니다. 오랜 생명력을 지닌 좋은 ‘코지’들은 모두 훌륭한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한 가지 더, 많은 분들이 일본의 ‘일상계’와 ‘코지’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궁금해하시는데요. 고전 미스터리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결국 두 서브 장르가 결국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일상계’는 ‘코지’의 일본식 해석이지요.
샤를로트의 우울, 곤도 후미에, 박재현, 현대문학
애니메이션 빙과, 총 23화

4. 그렇다면 좋은 ‘코지’란?

자, 여기서부터는 소비자보다는 창작자들을 위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나름 고민하다가 이 글이 공모의 가이드 역할도 할 것 같기에 덧붙여 보았습니다.
여러 규칙들을 얘기했지만, 이것들이 꼭 ‘코지’의 특성을 규정하고 또 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규칙을 지키면 코지, 어기면 불편’ 같은 단순한 이분법보다는 각각의 규칙들이 ‘코지’의 영역을 넓게 아우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죠. 모든 규칙을 만족하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습니다. ‘코지’라는 서브 장르를 정의하기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규칙들보다 중요한 것은 ‘독자’의 존재와 그 의미입니다. 영어권 ‘코지’ 중에는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 있습니다. 20~30권 넘게 시리즈가 지속된다는 의미는 그만큼 충성도 높은 독자들이 많다는 의미겠죠.
하지만, 이제껏 국내에 소개된 그야말로 쟁쟁한 영어권 ‘코지’들은 후속 작품이 뜸한 상태입니다. ‘앨런 브래들리의 플라비아 들루스 시리즈’, ‘조앤 플루크의 한나 스웬슨 시리즈’, ‘M. C. 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 ‘알렉산더 매컬 스미스 음마 라모츠웨 시리즈’ 같이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시리즈들도 지난 1년 내 후속권이 출간된 건 그나마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뿐이네요.
일본의 ‘일상계’는 어떨까요. 대표 선수라고 할 수 있는 기타무라 가오루부터 가노 도모코를 비롯해 수많은 작가들이 소개됐지만, 그 상업적 성공은 확연하게 갈립니다. 요네자와 호노부나 미카미 앤은 눈에 띄는 상업적 성과를 이뤘지만, 출간 여부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작품들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코지’ 창작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코지’는 함께할 독자층이 매우 중요한 서브 장르입니다. 기획으로 맞춰 가며 충성도 높은 독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코지’의 규칙을 숙지하거나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것보다 ‘우리나라의 현재 독자층을 어림’하는 것을 더 우선해야 합니다.
미스터리 장르는 여전히 좋아하지만, 잔혹한 카타르시스와 우울함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층은 확실히 우리나라에 존재합니다. ‘코지’는 그들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서브 장르죠. ‘고전 미스터리의 맛, 세계와 등장인물에 대한 낙관론, 순화된 선정성과 폭력성, 개성 있는 등장인물’. 손에 쥔 패는 단순하고도 확실합니다. ‘동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위에 서서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 행운을 빕니다.
decca가 추천하는 코지 미스터리 작품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권영주, 북폴리오 빙과, 애니메이션, 총 23화 움직이는 손가락, 애거사 크리스티, 권도희, 황금가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 미카미 앤, 최고은, 디앤씨북스 샤를로트의 우울, 곤도 후미에, 박재현, 현대문학 험담꾼의 죽음, M. C. 비턴, 지여울, 현대문학
글. decca(howmystery.com 운영자) "‘동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위에 서서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 행운을 빕니다."
편집. Clare(최다솜)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는데요, 지금 바로 왓챠플레이에서 보실 수 있어요! (저희 어머니의 최애작품입니다)"
안전가옥과 사전협의 없이 본 콘텐츠(글, 이미지)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