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난한 날들
“주변에 보이는 길이라고는 그 산으로 난 길 하나밖에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 보는 수밖에.”
아버지도 생전 내내 걱정했던 오지랖의 소유자 박화음. 하지만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그 오지랖 빼면 본인은 시체나 다름없다고 중얼거리며 그는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귀 기울인다. 귀 기울이는 천성에서 왔는지, 그는 식물에 남은 사념의 소리마저 듣는 청력을 갖추었다. 물론 이 능력은 유년까지는 자신을 괴롭혀 온 이상 징후에 다름 아니었지만, 그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몇 가지 사건을 거치며 자신이 가진 별수 없는 특성을 공동의 위기를 헤치는 무기로 벼려 나간다.
기후 소설이자 탐정 소설, 성장 소설이기도 한 《온난한 날들》은 무엇보다 개인의 모서리를 속속들이 더듬어 가는 모험과 그것을 마모시키지 않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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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목차
프롤로그
1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
2 이름 없는 무덤
3 도둑맞은 표본
4 유리온실의 탐정
에필로그
작가의 말
프로듀서의 말
작가 소개
윤이안
소설집 《별과 빛이 같이》, 기후 위기 문제를 다룬 미스터리 장편소설 《온난한 날들》을 썼으며 앤솔러지 《SF김승옥》에 참여했다.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이야기를, 조건의 한계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거대한 변화와 작은 변화
교단의 이름은 영천교. 하늘 그 자체가 인격화된 신, 하느님을 신으로 모신다고 알려져 있다. 교주인 박순영이 자신을 하느님의 대리자, 풍백(風伯)이라 칭하며 스스로 살아 있는 신을 자처했다. 내용만 들으면 전형적인 사이비였다. 게다가 풍백이고 천신이고 어디 단군 신화에서 대충 단어만 가져온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그런 짜깁기한 단어로 대충 만든 종교를 사람들이 믿어요?”
내가 그렇게 묻자 이해준 씨는 더 들어 보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말고 누가 듣는 것도 아니었는데.
“기본적으로 날씨에 중점을 둔 종교예요.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새롭게 떠오른 신흥 종교인 것 같은데, 기본적인 교리는 여느 사이비 종교와 다를 바 없이 이중적이고. 성경을 여기저기 잘라서 짜깁기했으니 앞뒤가 맞을 리가 없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교주인 박순영이 펼치는 주장이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윤이안의 첫 장편 소설 《온난한 날들》은 탐정 소설이자 성장 소설, 기후 소설이다. “기후 위기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아이들에게 그런 미래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라는 자문에서 작가는 ‘선택하는 사람’ 박화음을 내세워 한 가지 가능한 미래의 물꼬를 튼다. 기후라는 거대한 변화에 맞서 박화음은 특유의 오지랖으로 타인 삶에 관여하며, 제가 속한 환경을 변모시켜 나간다.
나는 몇 가지의 사소한 선택을 했다. 실종된 아이의 전단 을 받아 들면서, 유골함을 품에 안으면서, 그리고 홀로 죽어 간 남자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연쇄가 내 삶을 다른 길로 이끌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이 자주 내렸다. 쉼 없이 돌아가던 공장의 불빛이 꺼졌고, 하수 종말 처리장에는 플라스틱 컵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에코시티에 사는 사람들이 선택하고 방관한 미래였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내 삶을 다른 길로 이끌었듯, 각자의 선택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
마음 같아서는 이해준 씨의 차에다 토해 버리고 싶었다. 집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하필이면 또 오픈 타임 출근인 날이었다. 집까지 걸어가다가 날이 샐 테고,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은 채로 다시 출근해야 할 판이었다. 내가 고민하거나 말거나 몇 번 더 웃던 탐정 선생은 훌쩍 운전석에 올라탔다. 정말 얄미운 인간이었다. 내가 잘 가라고 인사하자 탐정 선생이 물었다.
“비닐봉지 좀 남은 거 있어요?”
남았으면 뭐, 어쩔 건데요. 내가 삐딱하게 묻자 이해준 씨가 조수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토해도 용서해 줄 테니까 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번개가 쳤다. 몇 초 뒤에 우르릉 하고 천둥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빗줄기가 또 굵어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변화’에 맞서는 박화음은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의 주체이지만, 변화시키거나 소거할 수 없는 제 천성으로 괴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인간이기도 하다. 주변의 사념을 간직한 식물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 자동차에만 올라타면 구토하는 버릇, 타인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오지랖 등 화음의 모난 부분은 타인과 사회의 눈에 띄는 것은 물론, 본인에게도 줄곧 눈엣가시다.
하지만 탐정이라는 범상치 않은 직업을 가진 이해준의 등장으로, 어느샌가 에코시티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하나둘 해결해 나가는 동안, 화음은 제 모서리들이 닳지 않으며 깎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무기가 됨을 깨닫는다. 기후 소설이자 탐정 소설, 성장 소설이기도 한 《온난한 날들》은 결국 개인의 모서리를 속속들이 더듬어 가는 모험과 그것을 마모시키지 않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책 속으로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이 자주 내렸다. 쉼 없이 돌아가던 공장의 불빛이 꺼졌고, 하수 종말 처리장에는 플라스틱 컵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에코시티에 사는 사람들이 선택하고 방관한 미래였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내 삶을 다른 길로 이끌었듯, 각자의 선택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있을까?
p. 10 | 프롤로그
날씨도 이 모양인데, 거기다 한술 더 떠서 한 사람이 하루에 버릴 수 있는 플라스틱 양도 제한되었다. 집을 플라스틱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플라스틱 사용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이 모든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새로운 일상이 기존의 일상을 밀어내고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게 내가 아는 온난화였다.
인간이 지구를 망친 대가를 받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가 진짜 견딜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점장님, 이 정도면 이제 아열대성 기후라고 해야 되지 않아요? 습해서 미치겠어요. 우리 에어컨 진짜 조금만 틀어요.”
p. 15~16 |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
어렸을 때 아빠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주말에 집에서 뒹굴다 케이블에서 해 주는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주인공이 납치당하는 뻔한 설정의 스릴러 영화였다. 주인공을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 여자를 구해 주려고 한 선량 한 시민들은 바로 그 선량함으로 인해 납치범에게 살해당했다. 누워서 엉덩이를 벅벅 긁던 아빠가 말했다.
화음아, 쓸데없는 오지랖은 죽음을 부르는 거다.
남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
나는 그때 그게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납치범이 시민의 뱃가죽을 칼로 쑤시는 걸 보면서 아빠의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아빠는 다시 한번 말했다. 오지랖은 뭐라고? 나는 대답했다. 죽음이요. 아빠의 조기 교육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나는 세상이 오지라퍼라고 부르는 종류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구르던 발이 점점 느려지고 느려져서 결국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자전거의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p. 31 |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
“탐정 사무소 계약직에는 아직 자격증이 필요 없거든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여기저기 법에 구멍이 많아요. 아무튼 불법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그냥 파트타임 잡 하나 맡았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왜요?”
“간단하긴 한데 좀 특이한 건이라서. 당신이 딱 적임자예요. 그, 영 능력으로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뭐가 있긴 한가 봐요?”
p. 103~104 | 이름 없는 무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탐정은 타인 삶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함께하게 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감각은 나를 기쁘게 만들기도 했지만 소름 끼치게 만들기도 했다.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관여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나는 식물에 남은 남의 사생활을 의도치 않게 엿듣는 게 늘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유리의 목소리는 순수하게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화를 끊고 자전거 페달을 더 힘차게 굴리기 시작했다. 페달에서는 차르르륵, 잠자리가 날개를 비비는 듯한 소리가 났다.
p. 156 | 이름 없는 무덤
퇴근 준비를 할 무렵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지금 당장 사무실로 와 줘요!”
받자마자 그 한마디만 비명처럼 남기고 전화는 뚝 끊어졌다. 전화 예절은 어디다 팔아먹은 건지. 처음엔 내가 스팸 전화를 잘못 받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이 핸드폰은 이해준 씨가 준 대포폰이고, 그 전화로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 스팸 전화일 확률은 극히 낮았다.
하필이면 또 이제 막 정리하고 퇴근할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내 스케줄 표를 꿰고 있는 것 같아서 조만간 점장님에게 이야기해서 스케줄을 바꾸려고 생각 중이다. 자기 편한 대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게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p. 159 | 도둑맞은 표본
주머니를 뒤져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얼마 전에 받은 명함과 명함 케이스였다. 조사원 일을 하고 돌아다니려면 명함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고, 이해준 씨가 억지로 손에 쥐여 준 것이었다. 심플한 하얀색 배경지에 아무 특징 없는 글씨로 “해준 탐정 사무소 조사원 박화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걸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보기에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명함이라 되도록 꺼내지 말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명함은 그게 전부였다. 카페 부점장은 명함 같은 게 필요한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케이스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신연주에게 건넸다.
“너무 힘들면 이 번호로 연락해.”
이야기 들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오늘처럼.
p. 230~231 | 도둑맞은 표본
내 말에 김의경은 허를 찔렸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속내를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김의경은 이내 허탈한 숨을 뱉으며 웃었다.
“그래도 이 일은 그 시작이 되어 줄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절대 못 잊을 테니까. 김의경이 남긴 그 말을 끝으로 병실에 경찰과 보안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p. 291 | 유리온실의 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