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오신다
모두 귀 길울일지라 우리의 허물을 벗기실
쇼-트 시리즈 15 《푸르게 빛나는》과 원형으로 연결되는 이야기
익숙한 일상과 우주적 공포를 결합한 한국형 코즈믹 호러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열여섯 번째 책 《그분이 오신다》 출간에 즈음하여, 이제 정확하게 안내하고자 한다. 이 작품집의 마지막 수록작 〈그분이 오신다〉는 쇼-트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 책 푸르게 빛나는 의 첫 번째 수록작 〈열린 문〉과 연결된다. 두 작품집의 전체 작품이 원형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모든 수록작은 배경과 세계관을 공유하며, 각각의 이야기는 그중 일부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개별 수록작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추었으되 긴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는 또 다른 정체성을 지닌다. 이른바 ‘픽스업(Fix-up)’ 방식의 구성이다.
두 작품집의 장르는 우주적 존재가 일으키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인간을 그리는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다. 인간은 우주적 존재의 의도를 파악하기는커녕 형태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 존재의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다.
정체불명의 존재와 불가사의한 사건에 맞닥뜨린 인물들이 각 작품에서 풀고자 하는 수수께끼는, 두 작품집을 전부 읽고 난 뒤 비로소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로 맞물린다. 이는 초대형 괴물의 일부만 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 끝에 괴물의 전체 형상을 그리게 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장르와 구성과 내용의 절묘한 일치다.
친근한 소재와 거대한 공포를 결합한 한국형 코즈믹 호러 《그분이 오신다》에는 두 작품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수록작 〈런〉은 밤길을 걷던 청년이 잃어버린 아이팟 한 짝을 찾으려다 기묘한 소리를 듣게 되는 사건을 통해 ‘읽음으로써 듣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며, 두 번째 수록작 〈그분이 오신다〉는 몰락할 위기에 처한 인기 유튜버가 괴생명체 목격 사건으로 부활을 꾀하려는 과정을 그리면서 인간의 시각이 일으키는 비극을 짚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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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목차
런 · 6p
그분이 오신다 · 30p
작가의 말 · 146p
프로듀서의 말 · 150p
작가 소개
김혜영
괴물을 사랑한다. 이 말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편영화 〈BJ PINK〉 와 〈소년의 자리〉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고,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단편 수상 작품집 2021》에 수록된 단편 〈토막〉과 안전가옥 앤솔로지 《호러》에 수록된 단편 〈습습 하〉를 집필했으며, 단편집 《푸르게 빛나는》을 출간했다.
줄거리
〈런〉
친구 민아와 놀다가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게 된 지우는 지름길이지만 조명이 어두운 공원 길을 택한다. 에어팟을 끼고 민아와 통화하며 걷던 지우는 실감 나는 좀비 분장을 한 배우들과 마주치고, 긴장한 탓에 빠르게 걷다가 에어팟 한 짝을 잃어버린다. 에어팟을 찾기 위해 큰 소리를 재생한 지우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명처럼 귓가를 찌르는 소리는, 기이하게도 지우가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던 곳에서 들려온다.
〈그분이 오신다〉
박종찬은 연간 수입이 1억 대에 달하는 이슈 유튜버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따돌림과 구타를 당했던 그는, 자신과 짝이 되기 싫다며 울던 초등학교 동창 양리나가 아이돌로 데뷔하자 그가 왕따 가해자라고 저격해 활동을 중단시키면서 주목받는 유튜버가 된다. 결혼 정보 회사에 최고급 서비스를 신청한 뒤 귀가하던 박종찬은 도로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검은 형체를 목격하고, 본인 차량의 블랙박스 동영상을 이용해 괴생명체에 대한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 채널에 올린다. 이튿날 데이트 매칭 결과에 불만을 품고 결혼 정보 회사에 연락한 그는 하루 사이에 본인과 양리나의 인생 경로가 본래의 궤도에서 크게 이탈했음을 알게 된다.
소설, 영화, 게임, 만화··· 무수히 변주되어 온 코즈믹 호러
개미는 아마 인간의 전체 생김새를 잘 모를 것이다. 어떤 개미는 인간을 손가락으로, 다른 개미는 신발 밑바닥으로 인식할 터다. 사람들은 고의로 혹은 실수로 개미를 죽이는데 개미가 사람의 의도를 알아챘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분이 오신다》 수록작의 장르인 코즈믹 호러 속에서 인간이 겪는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 외계의 존재 때문에 삶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지만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지는 못한다. 상대가 인간을 미물로 여긴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미국의 소설가 H. P. 러브크래프트가 구축한 코즈믹 호러 장르는 공포문학의 대가 스티븐 킹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H. P. 러브크래프트의 대표적 세계관인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개념과 캐릭터 등은 각종 소설, 영화, 게임, 만화에서 다양하게 차용되고 변주되었다. 코즈믹 호러라는 장르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분이 오신다》는 코즈믹 호러의 핵심을 구조와 내용, 두 가지 차원에서 구현해 장르의 매력을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괜찮다, 비극의 바다에서 나약하게 표류해도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작가의 또 다른 단편집 《푸르게 빛나는》을 언급해야 한다. 이 작품집의 수록작들은 《그분이 오신다》와 ‘픽스업’ 방식으로 연결된다. 픽스업이란 짧은 이야기들 속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서사, 긴 이야기를 만들게 되는 구성을 뜻한다.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기묘한 존재와 기이한 사건들은 이를테면 개미가 보는 인간의 한 부분과 같다. 개미 입장에서는 손가락 사이에 잡혔던 일과 신발 아래 깔릴 뻔했던 일이 별개의 사건이겠지만 실상은 양쪽 모두 한 사람의 행위였을 수 있다. 《푸르게 빛나는》과 《그분이 오신다》에 등장하는 요소들의 연결 원리가 이와 비슷하다.
각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재앙에 휩쓸리지만, 독자는 책장을 넘길수록 사건의 전말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한 작품 속의 의문을 해소하는 실마리가 다른 작품에서 슬쩍 드러나기 때문이다. 두 작품집을 모두 읽고 나면 한 작품집 전체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다른 작품집에서 밝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독자는 주인공들에 비해 많은 정보를 얻지만, 양쪽의 마음에 찾아드는 감정은 동일하다. 절대적 존재에 대한 공포, 대응할 수 없기에 드는 허무함, 너무나 작은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 더 많이 안다고 해도 불행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코즈믹 호러 속 세계와 닮았다. 경험을 쌓고 또 쌓아도 우리가 사는 곳을 속속들이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많은 불행은 전조를 숨기고, 상당수의 고통이 기습을 즐긴다. 숱한 대비와 노력은 종종 수포로 돌아간다. 비극의 가능성이 이토록 넘실대는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가야만 한다. 강해져야 한다고, 용기를 내라고,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이들에게 코즈믹 호러 소설은 묻는다. 실상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냐고. 어쩌면 우리의 기본값일 실의와 좌절이 그토록 나쁜 것이냐고.
괜찮다, 거대한 세계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도
《그분이 오신다》에 수록된 두 작품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두고 ‘보잘것없다’, ‘하잘것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런〉의 지우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갖는 의미란 그저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뿐’이라며 자신이 ‘평균의 목표, 평균의 욕망, 평균의 고난 속에서 지지고 볶다 끝을 맞이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분이 오신다〉의 종찬은 어렸을 때부터 외모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 그는 동창생인 인기 아이돌이 왕따 가해자라고 저격한 유튜브 동영상으로 유명세를 치르면서, ‘보잘것없었던 내가 누군가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주는 희열’을 만끽했다. 종찬이 행사한 커다란 영향력은 훗날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를 작은 존재로 되돌려 놓는다.
이 넓은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기엔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은 코즈믹 호러 특유의 공포감과 직결된다. 이 장르가 일으키는 두려움은 거대한 우주와 왜소한 인간 사이의 괴리에서 온다. 우주 차원에서 인간의 분투는 무의미한 일인데, 그 사실을 직시하기는 쉽지 않다. 초등학생 시절 같은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만 해도 평생 남을 트라우마가 생긴다. 온 우주에게 무시당하는 상황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광기든 절망이든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성인이 될 무렵 일종의 코즈믹 호러를 경험한다. 스스로를 향했던 시선을 바깥으로 옮기면서 세상과 자신의 크기를 다시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우, 종찬과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세계에 비해 나는 매우 작은 존재라고. 이 씁쓸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릇된 희망은 현실과 나 사이의 간격을 더 벌리고 만다. 실망한 마음을 안은 채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야말로 위로다. ‘우리의 보잘것없음이, 하찮음이, 무력함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손바닥만 한 지옥을, 이유 없이 끔찍하기만 한 도피처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분이 오신다》를 썼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책 속으로
-내가 볼 때 넌, 좀비 영화 속 캐릭터 중에 그런 타입이야. 좀비의 무서움과 잔혹함을 보여 주기 위해 물어뜯기는 행인 7.
“애매하게 행인 7은 뭐야?”
-주목도 낮은 엑스트라?
“뭐야. 상상인데 기왕이면 주인공 시켜 줘.”
-그럼 다음번엔 굳지 말고 뛰어.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주인공이잖아.
p. 15 〈런〉
나는 황급히 사운드 재생을 중단시켰다.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멀어지는 것만 같았던 소리의 크기가 달라졌다. 그것도 순식간에 가까워진 것이다. 소리가 사라지자 어두운 밤을 품은 숲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해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핸드폰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재생해 보았다. 거짓말처럼 큰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열 걸음 거리 앞까지 찾아온 듯이. 나는 황급히 소리를 껐다. 소름 끼치는 침묵 속에서 핸드폰을 든 손이 떨려 왔다.
p. 23~24 〈런〉
언뜻언뜻 가로등 빛에 닿은 그것의 형체는 처음 봤을 때처럼 기다란 벌레 다리 같지도, 시야를 완전히 뒤덮을 만큼 크지도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작은 짐승 같았다. 저게 뭘까. 속도 계기판의 바늘은 120km를 넘어섰다.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는 빠르게 커졌고, 130, 140, 150에 이르더니 이윽고 200을 넘겼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에게 조금도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p. 83 〈그분이 오신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 채널의 채팅방을 확인했다. 설정이냐, 실화냐, 조작이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심들보다 왼쪽 문을 열라는 말과 오른쪽 문을 열라는 말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더 눈에 띄었다. 그래. 이 영상의 내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보다 사람들은 왼쪽 문과 오른쪽 문을 열었을 때 펼쳐질 광경을 더 궁금해했다. 그게 더 재밌으니까.
p. 134 〈그분이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