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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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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좋아하던 만화 ‘탐정학원Q’. 코난과 김전일의 아성에는 못미치지만 나름대로 매니아가 있는 추리 만화다. 초등학생이 보기에는 조금 자극적일 수 있는데 오히려 그런 맛에 좋아했었다. 그 중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여자 주인공인 ‘미나미 메구미’. 무려 순간 기억 능력자이다. 눈으로 한 번 본건 절대 잊지 않는 능력. 어렸을때는 ‘와, 그러면 시험 같은건 다 백점 맞겠다!’ 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으나 다 크고나서 생각해보니 이런 저주받은 능력이 다 있나 싶다.
작중에서도 능력자로서의 고충이 나온다. 탐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봐야하는 살인 사건 현장을 머리에서 지우지 못해 괴로워한다던가. 물론 후반부가서는 어느 추리 만화처럼 반복되는 살인 사건에 무뎌져서 그런지 별 무리 없이 생활한다. 아직 중학생이라 살면서 괴로울만한 기억이 별로 없다는 것도 한 몫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메구미의 역할은 기억력으로 단서를 찾는 것보다 히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이것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주제와 어긋나니 각설하겠다)
어렸을때는 체감하지 못했지만 나는 기억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물론 순간 기억 능력자는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의대를 갔을 것이다. 학창시절 나는 외우는 것에 소질이 있음에도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성적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때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그래도 의대에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 머릿속 용량 대부분은 ‘뭐 이딴걸 다 기억하고 있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 유독 자신있는 기억력은 ‘숫자’와 관련이 있다. 다른 사람의 생일이나 특정 날짜에 대한 기억은 유독 오래 머리에 남는다.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일 같은건 좀 잊어도 괜찮을텐데 머릿속에 캘린더가 내장되어 있다. 날짜 감각에 관한 기억은 오차가 거의 없는 정도. 게다가 아이돌 생일 광고의 메카 삼성역 출퇴근 3년차. 관심 없는 아이돌의 생일이라도 ‘저 친구 생일이 특이하네’ 싶으면 머리에서는 이미 외웠다고 봐야한다. 내가 이딴걸 왜 외우고 있지..?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지워지지도 않는 TMI로 가득찬 내 머릿속, 나만 알기 아까운 정보를 가끔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12월 19일. 바로 MB데이이다. MB의 생일이자 결혼기념일이자 대통령 당선일인 12월 19일. 당일에 이 TMI를 알게 된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까지는 그냥 웃자고 한 소리. 재미 없었다면 사과드리겠다. 이정도 기억력은 그렇게까지 희귀한 재능은 아니다. 찾아보면 주변에 한 명 정도는 유별나게 기억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들은 기억 못하지만 그날 무엇을 했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 기억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기 편리한것만 기억하는게 아니라 당시 상황을 통째로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전 TV에서 배우 강부자님이 나와 몇 십년전 누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걸 보고 알았다. 다들 기억력 자랑하는건 똑같다.
당연한 얘기지만 장점만 있지는 않다. 망각이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메구미의 능력이 저주받았다고 하는 이유와 같다. 기억이 정보로서의 기능만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기억에는 감정이 담겨있다. 기억과 함께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올 때가 있다. 밀려온 과거의 기억에 잠식당하면 그게 좋았던 감정이든 나빴던 감정이든 간에 미래로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만 머무르게 된다.
“기억은 재능이야 너는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지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최은영 작가님의 단편 ‘한지와 영주’ 중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내가 안고 있는 기억이 얼마나 뜨거운지 체감하게 된다. 내려놓자, 내려놓자 다짐만 해도 기억이라는게 쉽사리 사라지지가 않는다. MB데이를 까먹지 않는 원리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결국 체념하게 된다. 그냥 살아야지 뭐 어쩌겠어. 이상 소소한 기억 능력자의 푸념이었다.
추신.
마지막 월간 안전가옥을 쓰는 날은 내가 탈고 하는 날일줄 알았다. 탈고보다 월간 안전가옥이 먼저 끝날줄은 정말 몰랐다….. 2년간 월간 안전가옥을 쓰면서 어떤 달은 쓸 거리가 풍족해서 신나게 써내려갔고 어떤 달은 과거 일까지 끄집어내 쥐어짜면서 썼다. 공통점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글이라는 것. 언제나 댓글 기능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달마다 쌓인 글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 월간 안전가옥도 다른 사람들의 월간 안전가옥도. 늘 재밌는 소식을 올려주시던 다른 작가님들과 매달 조금씩 마감을 어기는것을 너그러히 봐주시고 글에 관련 기사나 링크를 친절히 달아주시는 안전가옥의 운영멤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최수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잘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