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가옥의 겨울 공모전 중 '원천 스토리 공모전 : 대체역사물'을 보고, 대체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어쩌면 밤낮없이 고민 중이실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바로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 테드 창의 작품 <일흔두 글자>입니다. 한국에서 작가 테드 창은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을 쓴 분으로 유명하죠. <일흔두 글자>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 작품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분입니다 (그윽)
장르문학에 수여하는 수많은 상이 있죠. 그중에서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어워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대체역사 장르소설만 선정하여 상을 주는 사이드 와이즈 어워드(Sidewise Awards)입니다. 1995년 말에 최고의 대체역사 소설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고, 매년 8월경에 6만 단어를 기준으로 단편과 장편을 나누어 각 한 작품씩 선정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작품 가운데 지난 2000년 단편 부문에서 테드 창은 <일흔두 글자>를 통해 이 상을 받았는데요. 조금 어색하지 않습니까? '사이언스' 픽션을 쓰는 작가가 '대체역사' 장르 어워드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이요.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다 백 점 받는 이과생이 시험 삼아 쳐본 한국사마저 100점 받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니냐고요!
(여기서 잠깐!) 테드 창이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라는 사실만으로도 대충 아셨겠지만, 그는 21세기 가장 중요한 SF 작가로서 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하는 모든 상을 싹쓸이했습니다.
사실 영어권에서는 대체역사, Alternate History를 SF에서 파생된 장르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대체역사가 하나의 당당한 SF 서브 장르로서 자리 잡은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지점에서 이 <일흔두 글자>가 SF 장르로서의 대체역사 소설인지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일흔두 글자 Seventy-Two Letters>는 대체 무엇을 대체하고 있을까요.
그 답을 보기 전에 아래 줄거리를 읽어보세요. 아직 책을 안 읽어보신 분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일흔두 글자> 줄거리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인간이 이름의 주인인가, 아니면 이름이 인간의 주인인가?
- 테드 창, <일흔두 글자 Seventy-Two Letters>
#1
19세기, 영국이 대영제국이라 불리던 시기. 기계와 증기기관이 활발히 움직이며 산업혁명의 기운이 물씬 풍겨야 할 시대. 복잡한 기계 구조물이 아닌 여섯 개의 문자 12열로 이루어진 일흔두 개의 히브리 문자가 이 시대를 움직이고 있다.
#2
"이름의 원칙은 무엇이지?”
“모든 것이 신의 반영이듯, 모든 이름은 신성한 이름의 반영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이름의 작용이란 무엇인가?”
“해당 물체에게 신성한 힘의 반영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3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우주와는 다른 어휘적인 우주가 존재하며, 어떤 물체와 그에 조응하는 이름을 결합하면 그 물체에서 잠재된 힘이 발현되는 새로운 역사의 무대.
#4
19세기 산업혁명 시기. 증기기관이 아니라 고유 명사의 어원을 찾아가는 학문 '명명학'과 '연금술'의 집합체가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만들고 근대화를 이끈다. 이곳에 주인공 로버트 스트랜튼이 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명명학을 공부하면서 이름 좀 날린 학자다.
#5
'이름의 통합과 분해에 관한 최신 기술'(그러니까 실제 역사대로 한다면 '증기 터빈에 관한 최신 기술' 정도 급이 되겠다)을 연구한 그는 영국 유수의 자동인형 메이커 중 하나인 ‘코우드 매뉴팩토리’에 명명학자 자격으로 일자리를 얻는다. 그는 그곳에서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의 이름을 개발한다.
#6
“제 자동인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자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이런 자동인형들은 주조 직공들의 일을 빼앗을 거야.”
소규모로 자동인형을 주조하는 공장의 장인으로서 윌러비는 스트랜튼이 개발한 자동인형이 현재의 제조업 시스템 전체를 교란시킬 것이라고 본다. 앞으로 도움을 주기는커녕 스트랜튼의 개발을 막을 것이라고 위협한다.
#7
혁신적인 자동인형을 만들어서 공장 노동자를 위험한 일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원대한 뜻이 큰 벽에 부딪히자, 스트랜튼은 낙담한다. 그때, 호리호리하고 아무 장식 없는 옷을 입은 사내가 스트랜튼에게 필드허스트 가의 문장이 찍힌 명함을 건넨다.
'필드허스트 가의 3대 백작이고 저명한 동물학자, 비교해부학자이면서 왕립학술원에서 원장을 맡고 있기까지 한 그가, 일면식도 없는 나를 찾는다고?'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그의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8
필드허스트와 서로 의례적인 인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이것은 극히 중대한 문제라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모두 비밀로 간주하고 함구하겠다는 약속이 필요해.”
#9
굳게 약속하자 저택의 복도 끝 실험실로 안내되었다. 노인 하나가 가장 안쪽에 있는 작업 구획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트리니티 칼리지 재학 시절 은사였던 애시본 교수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뭔가 이단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 대학을 떠났다고 했는데…….'
#10
그는 말한다. '오 년 전, 파리 아카데미에서 영국 과학자들에게 은밀히 접촉해서, 그들이 실험을 통해 발견한 결과를 재확인해달라고 요청받았다고.' 대체 어떤 실험이길래 프랑스가 나서서 영국 과학자에 확인을 요청한단 말인가.
#11
필드허스트와 애시본 교수를 따라 더욱 깊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 안에는 욕조 크기의 네모난 수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희미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믿기 힘들군요.” 스트랜튼은 속삭였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오가고 왜 그가 이 실험에 초대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12
“자네가 개발한 이름들이, 일찍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간을 닮은 행동을 하게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우리 연구에 동참해주겠나?”
#13
연구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이후 여러 날이 지나고 비밀 연구에 매진하던 때에 누군가 찾아온다. 현대의 명명 과학을 혐오하는 신비주의자, 카발리스트인 그는 신을 더 잘 알기 위해 그리고 지고의 의식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스트랜튼이 찾아낸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다. 연구 내용을 철저히 함구해야 하기에 거절하자 카발리스트는 스트랜튼에게 분노를 퍼붓는다.
#14
연구의 성과가 조금씩 생기자 필드허스트 백작은 이 연구가 가진 잠재력을 스트랜튼에게 설명한다. 그 잠재력은 계급과 정책에 관련된 것이었고 스트랜튼은 경악한다. 이 반인륜적인 연구가 필드허스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애시본 교수와 함께 계획을 짜는데…….
#15
다음 날 저녁 해 질 무렵, 저녁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스트랜튼. 분명 전등 스위치를 꺼두었는데 살짝 열려있는 문틈 사이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서둘러 들어가니 한 사내가 책상 앞에 양손이 뒤로 결박된 채로 죽어 있었다. 전날 찾아왔던 카발리스트였다. 그의 손가락 몇 개는 부러져 있었고 살해당하기 전에 고문을 당한 것이다.
#16
자신의 자동인형은 완전히 박살 나있고, 모든 서류에 램프 기름이 뿌려져 있었다. 뒷문을 통해 복도로 뛰쳐나가자 어떤 사내가 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트랜튼은 어둑어둑한 건물 안을 질주했다. '도대체 누가, 왜 나를 따라오는가? 왜 내 사무실에서 저 카발리스트는 죽어있는가?'
#17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과학과 역사'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테드 창의 대체역사 소설 <일흔두 글자>였습니다.
<일흔두 글자>의 대체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1) 역사의 분기점
19세기 영국, 정확히는 1830~50년대 사이. 실제 역사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을 개발하고 기계의 발전이 한창일 시기에 이르죠. 그러나 소설에서는 ‘명명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발전을 보여주며 분기점을 형성합니다.
2) 실제 역사와 다른 역사 변화
이 분기점에서 명명학은 '동력'을 '고유 명사'로 대체합니다. 이로 인해 자동인형(골렘)의 활용, 종 생물학에 대한 연구 등 전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실제 역사
증기기관
방직기계
인공수정
대체 역사
이름/명명학
자동인형/골렘
호문쿨루스
그리고 종(種)에 대한 해석과 우리가 짐작하거나 또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제시가 있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밝힐 수는 없겠네요.
이쯤 되면 대체역사물은 단순히 역사물을 변형하는 장르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새로운 미래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SF 장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작품을 보신 분들도 많겠지만 아직 못 보신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일독을 권합니다. 테드 창에 의해 대체된 역사의 진실을 말이지요.
여담으로 테드 창은 이 <일흔두 글자>라는 한 편의 단편소설을 위해 제프리 '심슨의 문자 시스템(Writing System)', 윌리엄 새머린의 ‘언어학 현지조사(Field Linguistics)’, 유진 니더의 ‘어형론(Morphology)’, 케네스 파이크의 ‘음소론(Phonemics)’, 올리버 색스의 ‘목소리 보기(Seeing Voice)’ 등 수십 권의 언어학 서적을 읽고 공부했다고 합니다. ‘훈민정음’을 공부했으면 한국이나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언어와 이름에 대한 동양적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엇, 이것도 대체역사 이야기가 될 수 있겠군요.
2018년의 거의 끝자락, 12월 30일. 여러분의 새로운 대체역사물을 즐겁게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글. Teo(윤성훈) "본격 설레발 대체역사물을 쓰고 있겠습니다. '만약 너무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시면 어떻게 될까?'"
편집. May(김미루) "성지순례 왔습니다. 여기가 그렇게 용하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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