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티아
지구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다면?
몸에 갇혀서 사고하는 내가, 몸을 떠나서 여전히 나일 수 있다면?
《베르티아》는 본질적이므로 유구한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지구와 우주를 넘어선 관점으로 탐구하는 존재론적 소설이다. 이 소설집에 속한 세 가지 이야기, 즉 <바람메뚜기는 왕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와 <달이 외로움을 잊게 해 줄 거야>, <눈부신 빛을 손끝으로 느끼며>는 시공을 달리하지만, 이 본질적인 문제의식만은 철저하게 공유한다.
갑자기 접속이 끊어진 달 기지의 내막을 조사하러 나선 경물 조사관 ‘진서’. 500년간의 우주 탐사를 마치고 지구로의 귀환을 앞둔 베르티아의 항해사 ‘아지사이’. 인류가 유일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 육체에서 벗어나는 개척자 ‘플라스틱’. 이 세 명의 페르소나를 통해 과거와 현재, 너와 나의 경계를 초월하는 무지막지할 정도의 스케일을 펼치는 《베르티아》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우주를 공부하고 우주를 업으로 삼은 연구자의 설득력 덕분임은 물론, 그 섬세한 연구 기반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감수성과 탐구심인 까닭이다.
지금 《베르티아》를 만나보려면?
종이책
목차
첫 번째 이야기. 바람메뚜기는 왕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두 번째 이야기. 달이 외로움을 잊게 해 줄 거야
세 번째 이야기. 눈부신 빛을 손끝으로 느끼며
작가의 말
프로듀서의 말
작가 소개
해도연
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근지구 우주환경을 감시하는 일을 하면서 과학소설과 과학 글을 쓴다. 둘 다 아닌 것도 쓴다. <위대한 침묵>과 <외계행성: EXOPLANET> 등을 썼고 《궁극의 질문들》, 《대멸종》, 《텅 빈 거품》,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 등에 참여했다.
시공을 달리하는 세 개의 장대한 모험을 촘촘히 엮은 정통 SF 서사
지구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다면?
몸에 갇혀서 사고하는 내가, 몸을 떠나서 여전히 나일 수 있다면?
‘너’를 통해 ‘나’의 성질을 추출하고, 사회와 대립함으로써 개인성을 수호하며, 나의 몸과 나의 정신을 견주며 행위의 시작점과 교훈을 정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관습이다. 수천 년간 신에 대한 정의로 싸우고, 수많은 법을 개정하며 사회 시스템을 정교화하고, 인간의 본성을 논의해 온 것이 인간 스스로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베르티아》는 본질적이므로 유구한,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지구와 우주를 넘어선 관점으로 탐구하는 존재론적 소설이다. 이 소설집에 속한 세 가지 이야기, 즉 <바람메뚜기는 왕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와 <달이 외로움을 잊게 해 줄 거야>, <눈부신 빛을 손끝으로 느끼며>는 시공을 달리하지만, 이 본질적인 문제의식만은 철저하게 공유한다.
갑자기 접속이 끊어진 달 기지의 내막을 조사하러 나선 경물 조사관 ‘진서’에게는 달 기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쌍둥이이자 연인이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진서의 꿈은 마치 ‘또 다른 나’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또 다른 나’의 시점에서 ‘나라고 믿어 온 나’를 바라보고 사랑하는 진서의 고유한 관점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500년간의 우주 탐사를 마치고 지구로의 귀환을 앞둔 베르티아의 항해사 ‘아지사이’다. 저들 기억의 빈틈을 수상하게 여기던 아지사이와 그의 동료들은, 초토화된 지구와 퇴화한 인류를 맞닥뜨린다. 인류가 유일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 육체에서 벗어나는 개척자 ‘플라스틱’은 마지막 이야기 <눈부신 빛을 손끝으로 느끼며>의 주인공이다. 플라스틱은 베르티아에서 전수한 배움을 통해 각성하고, 여러 문명을 탐사하며 지구가 진정 단독자인지 알아내고자 한다. 그는 지하 무인기지에서 발견한 두 번째 베르티아에 이름을 붙이고, 태양계를 벗어난다. 초거대 블랙홀 보이드에서 미래가 아닌 과거로 흘러 들어온 플라스틱은 이미 경험한 유구한 미래를 과거처럼 더듬는다.
인간의 시선을 넘어서서 살핀 존재의 근원
이 세 명의 페르소나를 통해 과거와 현재, 너와 나의 경계를 초월하는 무지막지할 정도의 스케일을 펼치는 《베르티아》의 현실성 내지 진실성은 우선은 우주를 공부하고 우주를 업으로 삼은 연구자의 설득력 덕분일 터다. 확장 현실의 발달이 새로운 형태의 생물학적 진화를 불러온 근미래의 상황과 이때 벌어지는 소란들, 대부분 소프트웨어로 구축된 확장 현실을 살아가는 인류 속에서 드물게 물성 강한 현장에서 일하는 조사관을 지칭하는 개념인 하드필드 워커, 태양계 바깥을 연구하기 위한 달 기지 시너스 이리둠, 근지구 통신 위성 시스템을 이용한 스마트 기기 너스폰, 인간의 의식을 기계에 옮겨 심는 마인드 업로딩 기술 등은 그 정의와 적용 양상이 무척 구체적이고 가깝게 느껴져 SF라는 장르를 잊게 한다.
또한 한층 더 독자의 공감과 애착을 이끄는 것은 이러한 섬세한 연구 기반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감수성과 탐구심인 까닭이다. 나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감각, 타 존재와 비교하여 귀납적으로 특질을 포착하려는 노동 집약적인 연구 이전에 느끼는 찰나의 감정을 하나의 우주 속에 갇히지 않는 순수한 결정(結晶)으로 묘파해 낸 소설이 바로 《베르티아》다.
책 속으로
별과 별 사이를 본다. 텅 빈 공간이다. 사실은 비어 있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빛의 일부밖에 보지 못하는 불완전한 광 수용체가 만들어 주는 어둡고 황홀한 공허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눈부시게 빛나는 우주를 바라봐야만 하는, 전구 속에 갇힌 신세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내가 있다. 그러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 다른 게 있다면 내가 여기에 있어 봐야 뭐 하겠는가.
p. 11
“완전 인간형 로봇이 금지된 이유를 기억하나요? 인공 지능이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게 증명되자마자 사람들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로봇들을 학대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인간을 닮은 로봇을 향한 폭력은 다른 인간에게도 퍼져 나가기 쉬웠어요. 그렇다고 그들이 진짜 인간이나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완전 인간형 로봇 학대 금지법 따위를 만들 수는 없으니 그냥 생산을 금지해 버린 거죠.”
p. 83
“내 예상대로라면 멀지 않은 시기에 지구 전체의 연결망을 하나의 뇌로 이용하는 상위 의식체가 발생할 거야. 그걸로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변칙을 정확히 소모할 수 있고. 필연적인 발생인 거지.” “인간이 만들어 낸 물건엔 의식이 깃들 수 없다고 한 게 당신이었잖아.” “이건 내가 만드는 게 아니야. 번개를 유도하는 것과 번개를 만드는 게 전혀 다른 일인 것처럼. 난 그저 상위 의식체의 발생을 촉진하려는 것뿐이고.”
p. 116
우리는 우주에 홀로 존재한다. 이것은 안도일까, 슬픔일까, 위기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오랜 과거에 존재했던 가짜 신에게는 이것이 공포였고 그는 이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가짜 신은 무책임한 자멸을 선택했고 우리는 땅속으로 도망쳤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의심했다.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신에 대한 말이 아니다. 나는 신에게는 관심이 없다. 가짜 신은 나약했을 뿐 이다. 내가 믿지 못했던 건 우리가 우주에 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니.
p. 225
48억 년이 지났다. 빛의 속도로 다가오는 눈부신 소멸에 손을 뻗는다. 수소 원자의 전자마저 멈춰 버린 짧은 시간 속에서 소멸의 빛을 손끝으로 느끼며 나는 이 기록을 남긴다.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고 결코 존재하지 않을 기록을. 이 우주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무의미한 정보를.
p. 308-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