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인 집(House)에서, 가장 위험한 사건(Horror)이 벌어진다.
지난 시간에는 하우스 호러 장르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미권의 하우스 호러 영화들을 소개했어요. 대표작으로 <파라노말 액티비티(2009)>와 <컨저링(2013)>을 소개했고, <힐 하우스의 유령(2018)> <샤이닝(1980)> <유전(2018)>까지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동양의 하우스 호러 영화들을 소개할 예정이에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홍콩)의 하우스 호러 영화들을 하나씩 소개할게요.
장화, 홍련 (2003) - 한국
미국의 정통 하우스 호러 + 일본 스타일 귀신 + 한국 민담 ‘장화홍련전' 차용 = 명작 하우스 호러 탄생
개봉 당시 역대 국내 호러 영화 관객 수 1위 (2019 1월 현재 4위)
집요할 정도로 미술(집, 벽지 등)에 집착하여 분명 호러인데 아름답다는 평을 받음
2003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장화, 홍련>입니다. 한국 호러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죠. 이 작품 역시 정통 하우스 호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영미권 하우스 호러와 비교했을 때 악령이 (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수 있겠지만, 거대한 저택을 배경으로 내세워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호러 연출은 정통 하우스 호러의 특징들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죠. 아예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구요. 영미권 하우스 호러에서의 악령이 <장화, 홍련>에서는 ‘원혼' 정도로 대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스릴러의 구조를 취합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도록 하는 것이죠. (소극적이지만) 반전의 장치가 두어 번 존재해요. 대단원에 이르러 원혼의 정체가 밝혀지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이 영화가 호평을 받은 것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마지막 시퀀스)에서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쾌감과 압도적인 슬픔의 정서를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호러 장르에서 슬픔이 함께 묻어나는 서사는 영미권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한국이나 일본, 중국의 호러 콘텐츠에서는 절대적으로 악하기만 한 귀신보다는 사연을 가진 ‘원혼(혹은 원귀)’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슬픔이 묻어나기 마련이죠.
영화 <장화, 홍련>은 사건이 벌어지는 집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표현했어요. 영미권 하우스 호러에서 집을 기괴하게 표현하는 것과는 또 다른 부분이죠. 게다가 집 안의 가구와 벽지의 패턴과 색감까지 아주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어요. 배우들(염정아, 임수정, 문근영)은 분명 신경질적이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형처럼 예쁘게 그려지죠. 이러한 미장센이 슬픈 이야기를 만나 아주 매력적인 하우스 호러가 완성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독특한 분위기의 호러 영화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자, <장화, 홍련>에 드러난 하우스 호러의 특징을 살펴보죠.
1) 배경은 호수 옆에 위치한 아름다운 목조 저택
2) 가족들은 과거에 이 저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을 겪었다.
3)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오히려 이상한 일들이 더 많이 벌어지고,
4)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넷이 아니라 둘이다?!
5) 사이코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진짜 귀신도 있었어?!
6)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깊은 슬픔의 정서로 마무리
미술, 음악, 배우 등 모든 것이 아름다운 가운데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결국 모든 진실을 알고 난 후에는 깊은 슬픔이 찾아옵니다. 이런 건 영미권 하우스 호러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것들이에요. 한국 호러 영화 중에서 <장화, 홍련>과 비견될 만한 작품이라고는 정식, 정범식 감독의 영화 <기담 (2007)> 뿐일 것 같아요. (<기담>도 어찌 보면 하우스 호러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정통 하우스 호러의 범주에 넣기는 어려우니 다음 편에서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장화, 홍련>도, <기담>도 하우스 호러를 즐기고 싶다면 꼭 감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온 (비디오판 1999, 극장판 2002)
관절꺾기 귀신의 본가 일본의 대표적인 호러 영화.
영미권의 호러와 확연히 구분되는 서사. 해결책이 없는 원혼의 존재.
비디오로 시작하여 극장판 영화 제작, 미국 진출.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거머쥐며 세계 정복.
일본식 호러의 끝장판, 시미즈 다카시 감독의 영화 <주온>입니다. 이 작품은 비디오판으로 시작해 극장판과 스핀 오프, 심지어 미국판까지 시리즈를 확장했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리고 싶은 작품은 그중 1999년에 나온 비디오판(주온 오리지널 1, 2)과 2002년에 개봉한 극장판 1편입니다. (다른 작품들은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요. 거의 자기 복제 수준으로 비슷한 서사와 연출이 반복되거든요.)
주온이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의 공포를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링>의 야마무라 사다코(티비에서 기어 나오는 그 친구)와 더불어 <주온>의 사에키 카야코는 비주얼 충격 그 자체거든요. 가늘고 길게 트림(?) 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나타나 기괴한 관절 꺾기를 시도하는 카야코는 그냥 앞뒤 맥락 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아요. 게다가 이 친구들은 벽장 속, 계단, 엘리베이터, 이불 속, 심지어 욕실에서까지 나타나요. 그리고 만나면 무조건 죽어요. (안 죽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건 죽는 것보다 끔찍하구요…)
아 정말 너무 무섭다..........
<주온>을 정통 하우스 호러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정통 하우스 호러의 범주로 보는 편이에요. 일단 저주받은 집, 그러니까 카야코와 토시오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일본식 2층 주택에서 많은 사건이 벌어지거든요. 카야코와 토시오의 주요 서식지(?) 역시 이 집이고, 모든 저주는 이 집을 매개로 해서 시작돼요. 앞서 잠시 언급했듯,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집의 곳곳에서 가장 무서운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구요. 그냥 위의 gif(움짤) 하나로 하우스 호러의 모든 것이 표현되잖아요…(그나마 저게 덜 무서운 짤)
<주온>은 (비디오판과 극장판 1편까지는) 군상극의 구성이고, 지난 콘텐츠에서 언급한 <컨저링>처럼 퇴마사가 등장하여 악령을 퇴치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퇴마사 대신 형사들이 등장하여 해결사 역할을 하려 시도하지만, 되려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죠. 이런 방식은 영미권 정통 하우스 호러와 <주온>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영미권 하우스 호러는 선과 악의 대립 구도를 분명하게 하고, 둘 중 하나가 승리하게 하는 서사를 자주 사용해요. 하지만 주온은 선과 악이 대립하기는커녕 둘의 경계조차 모호해요. 카야코와 토시오는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이고, 그래서 원혼이 되었고, 그래서인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모두를 괴롭혀요. 이 원혼들은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죽이는 게 목적이에요. 그러니 아무리 형사라 한들 이겨낼 재간이 없죠. 저주를 멈출 방법도 없고요.
이러한 차이는 <주온>이 미국 시장에 진출했을 때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시미즈 다카시 감독이 연출한 미국판 주온 <그루지 (2004)>에서는, 공포를 표현하는 방식은 일본판과 같았지만 서사의 진행 방식에서 전에 없던 시도를 해요. 바로 해결사 역할을 하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가 해결하게 만들었죠. <주온>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 부분 때문에 <그루지>에 실망했지만, 정작 <그루지>는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흥행 성공을 거둡니다. 시미즈 다카시 감독은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한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되었다니까요.
<주온>에서 보이는 하우스 호러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주된 배경은 카야코와 토시오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집. 일본식(작은) 2층 구조의 주택.
2) 벽장, 화장실, 이불 속등 집안 곳곳에서 등장하는 귀신들.
3) 귀신들의 저주를 막을 방법은 없다. 해결사가 없다.
4) 그 집에 사는 사람 죽음.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 죽음. 그 집에 살았거나 들어갔던 사람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도 죽음. (걸리면 다 죽는거여)
5) 그래서인지 군상극 형식을 택함. 에피소드의 제목은 피해자 이름이고, 피해자(죽는 사람)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토시오와 카야코를 만나고 죽는 것으로 끝남.
6) 토시오와 카야코는 죽지도 않고(당연하지 이미 죽었는데), 소멸하지도 않고, 쫓겨나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저주를 걸고 사람을 죽인다. (시리즈 및 유니버스의 확장성)
<주온>은 정말 무서워요. 무섭고, 불편해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영미권의 하우스 호러 작품들과 앞서 언급한 <장화, 홍련>같은 영화들과는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어서 더 무서워요. 퇴마사의 도움으로 악령과 맞서거나, 기이한 일들의 정체를 파악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하지 않아요. 살아있는 인간들은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주받은 집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요. 이유도 모르고, 해결책도 없죠. 도와줄 사람도 없고요. 게다가 그 귀신들은 저주받은 집뿐만 아니라 우리 집까지 따라와요.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이불 속에, 창가에, 엘리베이터에, 벽장에, 욕실에서 나타나요. 잘 만들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에요. 만약 <주온> 감상에 도전하시겠다면, 비디오판 1,2편을 먼저 보고 나서 극장판 1편까지 보시는 게 좋아요. 그래야 최소한의 배경 이야기를 확인한 채로 토시오와 카야코를 맞이할 수 있을 거예요.
고잉 홈 Going Home (2002) - 중국(홍콩)
한국의 김지운, 태국의 논지 니미부트르, 홍콩의 진가신. 세 명의 감독이 호러 장르라는 기획 아래 만든 단편들을 모은 영화 <쓰리 (2002)>에 수록된 작품.
대저택이 아닌 홍콩 특유의 높고 허름한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는 하우스 호러.
역시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 호러 장르에서 멜로의 서사를 솜씨 좋게 녹여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참 다양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한국의 김지운 감독, 태국의 논지 니미부르트 감독, 홍콩의 진가신 감독이 ‘호러 영화'라는 기획 아래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 <쓰리 (2002)>인데요, 각 감독들은 자기 나라 고유의 색깔을 드러내는 호러 영화를 만들고, 이를 한 영화로 묶어서 개봉했습니다. 이 기획은 2004년에 한 번 더 진행되었는데요, 그때는 <쓰리, 몬스터>라는 제목의 영화로 개봉했습니다. 한국의 박찬욱 감독, 홍콩의 프르투 챈 감독, 일본의 미이케 다케시 감독이 만든 세 편의 공포 영화를 모아 개봉했죠.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쓰리, 몬스터> 이후로는 진행되지 않더라고요.
영화 <쓰리 (2002)>에 수록된 세 작품 모두 좋았지만, 저는 진가신 감독의 <고잉 홈>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일단 아파트를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무척 좋았어요. 영미권 하우스 호러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다락방과 지하실 딸린 대저택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저로서는 공감하기가 조금 어렵잖아요. 이 영화에 수록된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즈> 역시 신도시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집'보다는 아파트 단지에 주목했기에 정통 하우스 호러라고 보긴 조금 어려워요. 하지만 진가신 감독의 <고잉 홈>은 첫 장면에서 철거 직전의 아파트 단지를 보여주며 시작하고, 주된 이야기는 허름한 아파트 내부에서 진행됩니다.
철거 직전의 허름한 아파트에 현직 경찰과 그의 아들이 이사 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웃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실종되고, 아들을 찾기 위해 이웃들을 조사하던 경찰은 병든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는 수상한 이웃의 비밀을 발견하죠. 그는 병든 아내가 아니라, 죽은 아내의 시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경찰을 납치하고, 3일 뒤에 아내가 살아날 거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합니다.
철거 직전의 허름한 아파트, 사라진 아들,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보살피며 3일 뒤에 살아날 것이라 주장하는 수상한 이웃. 이 정도면 충분히 정통 하우스 호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저택이 허름한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이죠. 이상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이내 주인공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 이웃에게서 벗어나 아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허름한 아파트 안에서 말이죠.
<고잉 홈>에서 드러난 하우스 호러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1) 배경은 철거 직전의 허름한 아파트. 공실이 많고 이웃이 별로 없다.
2) 실종된 아이를 찾기 위해 움직이던 주인공은 수상한 이웃의 비밀(죽은 아내의 시체를 정성스럽게 돌봄)을 발견한다.
3) 이웃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을 감금하고, 3일 뒤면 아내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이상한 말을 한다.
4) 수상한 이웃의 처절하고 슬픈 비밀이 밝혀진다.
<고잉 홈>은 정통 하우스 호러의 설정을 사용하지만, 악령이나 귀신이 등장하는 호러는 아닙니다. 아내의 시체를 정성스럽게 씻기고 입히고 화장까지 시키며 3일 뒤에 아내가 살아날 것이라 믿는 수상한 이웃 ‘사람'이 등장할 뿐이죠.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수상한 이웃의 과거가 드러나고, 그의 기이한 행동의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러니 <고잉 홈>은 정통 하우스 호러의 설정과 오컬트 요소, 그리고 절절한 멜로를 절묘하게 섞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화, 홍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애절한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알면서도 당한다는 멜로 영화의 클리셰 ‘영상 편지'까지 등장한다니까요!)
앞서 언급한 <장화, 홍련>이나 <주온>과는 전혀 다른 결의 하우스 호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끔찍한 묘사도 없는 편이고, 귀신은 거의 등장하지도 않아요. 그러니 더욱 강력 추천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우스 호러 특집 03 : 하우스 호러의 다양한 변주]로 돌아올게요. 정통 하우스 호러라고 보긴 어렵지만, 하우스 호러가 가진 특성을 확장, 변형하여 만들어진 콘텐츠들을 살펴볼 예정이에요. 오늘도 안전한 밤 되시길...
글. Shin(김신) "다른 건 몰라도 <고잉 홈>은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편집. Clare(최다솜) "아 저 이거 밤에 읽어보다가.. gif 때문에...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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