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추천받았던 소설, <솔라리스>를 이제야 읽었다. 언젠가 동명의 영화를 본 후 선뜻 소설에까지 손이 가지 않았다. 영화가 형편없었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는 터널에 먼저 닿았을 뿐.
원작소설과 영화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지만 이제껏 그 폭이 그리 컸던가를 떠올려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솔라리스>는 소설과 영화가 이야기 면에서 공통된 뼈대를 가지고 진행되지만 어느새 둘로 나뉘어 있고 각각이 던지는 메시지도 달랐다. 얼마나 달랐는가는 <솔라리스>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본 후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우주 공간에서 무언가 놀라운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했지만, 타르코프스키는 불편한 우주 공간에서 빨리 빠져나와 지구로 돌아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했다.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마차를 끄는 말의 입장이었던 셈이다. (출처 : 3인 3색， 소설 <솔라리스>와 영화 <솔라리스>들)”라고 평한 것으로 요약하고,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이렇다.
먼 미래, 인류는 솔라리스라는 행성을 발견한다. 솔라리스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궤도에 속해 있으면서도 안정적인 궤도를 돌고 있다. 행성의 표면은 진득한 물질인 바다가 뒤덮고 있고 연구 결과 이 바다가 행성의 궤도를 안정시키는 힘, 항상성을 유지해주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거기에 더해 이 바다는 지적 능력마저 갖추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솔라리스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진이 이 행성에 기지를 세우고 바다와 소통을 시도하는 등 연구를 지속해보지만, 연구는 거듭 실패한다. 결국 세 명의 연구진이 솔라리스에 남아 쓸쓸히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이제 막 솔라리스에 도착한 주인공 켈빈은 연구진 세 명 중 한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어딘가 불가사의한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솔라리스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일들이 일어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켈빈은 죽은 아내인 레야와 뜻하지 않게 조우한다. 켈빈은 마땅히 없어야 할 존재가 눈앞에 살아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레야를 로켓에 태워 날려 버린다. 하지만 레야는 다시 이전의 기억은 모두 잊은 채 다시 생성된 몸으로 켈빈 앞에 나타난다.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지 과학자의 방법으로 확인해본 결과 미친 것도 아니다. 켈빈은 이곳의 레야가 실체가 아닌 켈빈의 정신을 채우고 있는 죄책감과 내면적 갈등의 표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켈빈은 서서히 솔라리스가 이 방문자를 끊임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자’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레야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고 큰 혼란에 빠진 채 허무와 절망 사이를 오간다. 그러다 스스로 파국으로 치닫는 행동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실체 아닌 레야는 죽음에 이르지도 못한다. 극심한 감정적 동요 속에 시달리는 레야는 마침내 동료 과학자가 발명한 붕괴 장치에 의해 완전히 소멸해버리고, 켈빈은 또 한 번 레야와 이별한다.
여기까지가 이야기를 이루는 비교적 명확한 사건들만 요약한 것이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켈빈의 깨달음이 이어진다.
켈빈은 솔라리스에서의 불가해한 사건들을 겪어낸 후 홀로 독백한다. 켈빈은 평생을 솔라리스 연구에 바친 사람이다. 아니 백 년 전부터 수많은 사상가와 과학자들이 솔라리스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이해 범위 바깥에 머물러 있는 솔라리스.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줄로만 알았던 레야와의 재회, 그리고 또 한 번의 이별. 우리는 묻게 된다. 이제 켈빈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 분명한 건 켈빈은 과거의 켈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
‘새로운 관심 분야를 찾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하겠지만, 나는 거기에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두 번 다시 그 무엇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지 않으리라. 밤이 되면 쌍둥이 태양의 햇살이 닿지 못하는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모든 것을, 심지어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기억해낼 것이다. 겸연쩍은, 약간의 후회가 담긴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어떤 희망을 품었었는지를 떠올리겠지. 이러한 미래 속의 켈빈을 과거의 켈빈, ‘접촉’이라는 이름의 야심 찬 임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던 과거의 켈빈보다 그 가치가 떨어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나를 심판할 권리를 갖지는 못하리라.’
켈빈은 이제껏 인간의 이해범위 안에 존재하지 않았단 신을 떠올린다.
켈빈 : 본질적인 특성 자체가 불완전한 신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지식과 능력이 한정되어 있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며, 자신의 피조물이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해도 어쩌지 못하는, 그런 신 말입니다. 말하자면…. 병든 신이라고 할까요. (생략)”
스노우 박사 : 아마도 진화하는 신,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하고 발전해서 자신의 무능을 의식하는 동안에도 계속 힘이 커지는 신을 말하는 것이겠군. 그런 신이라면 목표가 없어야 신성한 조건이 마련되는 셈일 테고. 그걸 이해하는 순간 절망하게 되겠지.
켈빈의 말에 이어서 스노우 박사는 켈빈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며 철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비론적인 의미에서 궤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켈빈은 자신이 말한 존재가 인간과 일면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인간의 정의 자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켈빈 : 흔히 인간이 신을 창조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중략) 인간은 자신의 시대에 봉사할 수도 있고 반기를 들 수도 있지만 그러한 협력이나 반기는 인간의 내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세상에 단 한 명의 인간만 있다면 그는 완벽한 자유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는 실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제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존재-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존재-는 복수형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에 스노우 박사는 켈빈이 이야기하는 존재가 솔라리스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솔라리스’의 저 먼바다를 바라본다. 하지만 켈빈은 바다 역시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말을 이어간다.
켈빈 : 바다는 계속 되풀이되는 속성을 보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존재는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은하계 어느 변두리에서 이미 태어났을지도 모르고, 머지않아 어떤 별은 없애 버리고 어떤 별은 새로 만들어내는 일에서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스노우 박사는 그런 존재는 이미 있다고 또다시 반박하다가 말을 잇는다.
“또 솔라리스는 당신이 말하는 신성한 아이의 요람일 테고.”
곧이어 그는 뭔가 알아낸 듯 미소가 짙어진다. 결국, 두 사람은 솔라리스가 ‘절망하는 신의 첫 번째 단계가 될 수도 있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어쩌면 그 지능이 크게 높아질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우리가 정리한 솔라리스에 대한 모든 자료는 첫걸음마를 떼어놓을 때의 흔적을 모은 것일 테고….”
“우리는 한동안 그 아기의 장난감 노릇을 한 셈이다…. 그럴 수도 있지요.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압니까? 당신은 솔라리스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낸 겁니다. 축하합니다!”
스노우 박사는 켈빈에게 묻는다. 왜 이런 불완전한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나도 모르겠습니다. 나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거든요. 내가 보기에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신이 바로 그런 신입니다. 그는 구원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구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지도 않고. 그저 존재하는 신일 뿐이지요.”
나는 켈빈의 독백을 오해했었다. 급격한 허무주의에 빠졌거나 혼란스러운 마음을 주체못해 냉소를 띤 켈빈의 얼굴을 떠올렸었다. 그러나 스노우 박사와의 대화를 읽고 난 후, 켈빈은 자신이 믿어온 것들을 차갑게 외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제단 위에 새로운 것을 올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도 희망이 생겼다.
내 작은 방 벽에는 빨강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단어가 쓰여 있다. 항상성과 자기 완결성. 나는 이 두 단어를 동경해왔다. 동경해온 시간 속에는 점점 자신을 굳어 버리게 만드는 오독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다. ‘동경해 왔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건, 그간 이 두 단어가 나에게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생각이 책 속 내용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설명하기 어렵다. 내게는 그저 한가지 질문만 남았을 뿐이다. 그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믿으며 살아온 것일까.
나는 이 책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 첫 장을 야심 차게 펼쳐 들었건만 읽어갈수록 쪼그라들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성기고 투박한 감상을 적어두는 이유는 이야기 속 켈빈이 그랬던 것처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어딘가가 달라진 것 같다는 감각 때문에. 그리고 또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 그때의 나는 또 무엇을 향해 가고 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에. 엇나간 이해에도 변화는 있으리라 믿기기 때문에.
이야기의 좋은 길잡이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발췌 일색인 글이 되고 말았다. 문장들을 더듬더듬 거치고 여러 번 되돌아가길 반복한 독서였지만, 언젠가 이 책을 반드시 다시 펼치리라는 예감이 든다.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다시 길을 잃기 위하여.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헤이든
"하지만 렘의 소설은 ‘읽기만 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