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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예지 만들까

작성자
박서련
분류
파트너멤버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동주>를 봤다.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당선이 되었다는 소식으로 시작하는 영화였다. 이어 몽규는 동주에게 우리, 문예지 만들까? 너 거기에 시 발표할래? 묻는다. 동주는 그 말을 달가워 하는듯도 하지만 어쩐지 내내 시무룩해 보인다. 시에 온 마음을 바친 자기보다 사촌이 먼저 등단해서였을까. 그러고 보면 그 등단이라는 것의 역사가 꽤 유구하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등단, 말이 참 멋있다. 정확한 한자를 몰라도 단에 올랐다는 의미인 것은 유추할 수 있겠지. 말난 김에 한자 뜻을 찾아보니 역시나 오를 등에 단 단자를 쓴다고 한다. 단은 제단이나 터를 의미한다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로 풀면 문단에 오른다는 말. 문단이 뭔데 ‘오른다'는 표현을 쓸까? 문단이 올라야 하는 터라면 문단 아래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교원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독서교육 세미나에 초청을 받아 내 소설 이야기를 하러 간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나는 선생님들에게 내 소설은 이런 배경에서 이런 의의를 가지고 쓴 것, 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해당 행사를 주관한 시설에서 일하시는 (내 기준) 고위 교육공무원이신 분마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어색하고 송구하고 쑥스러워서 기절할 뻔했다. 선생님이라니. 선생님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호칭이 아니었나? 사회적 존경은 대체로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나? 객관적으로 공부도 많이 못했고 돈도 많이 못 버는 내가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선생님 같은 소리를 들어도 되는 걸까?
나 역시 등단을 해야 작가라고 믿었고 등단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끙끙 앓아 가며 글을 썼다. 하고 보니 그건 이제부터 자기소개를 할 때 작가라고 말해도 된다는 면허 이상이 아닌 것 같았다. 등단을 한다고 국가에서 연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책이 한 권 뚝딱 나오는 것도 아니고 취직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시험인데, 다시 아무리 생각해도 노력한 것에 비해 큰 혜택이 없었다. (뭐? 혜택을 바라고 작가가 되었단 말이야? 같은 비난은 사양하고 싶다. 먹고는 살아야지, 사람이…)
등단 제도가 예비 작가를 검증하는 시험대로서는 효과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이미 작가로 검증받은 사람들이 심사를 맡아 기백, 기천 편의 원고 중 단 하나를 뽑아내는 일이니, 그걸 통과한 것이 어찌 훌륭한 작품, 훌륭한 작가가 아니랴. 그런데 나는 자꾸 최종심을 맴돌다 결국 당선되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아폴론 11호를 타고 달까지 갔는데 우주선에서 내려 발자국을 찍지는 못한 마이클 콜린스에 대해 말했던 <20세기 소년>의 대사처럼. 그들의 실력이 모자랐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는다. 심사평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 아닌가, 당선작과 최종심 작품을 두고 끝까지 고민한다는 것은.
혹자는 최종심에 자꾸 가다보면 결국은 당선되더라, 같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글쎄, 그건 끝내 당선된 사람들이나 가질 수 있는 의견이라 느껴진다. 수 차례의 최종심을 끝으로 단념하거나 죽은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그들은 별 의견을 전하지 못한 채로 퇴장했을 것이다. 전했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거나.
당선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중요하다. 나의 특기는 사람을 홀리며 몰아치는 장광요설인데 심사위원이 하필 건조한 문체를 최고로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이북 사람과 남측 사람의 교감을 실감나게 쓴 이야기를 투고했는데, 마침 그때 현실의 대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 있는 상태라면? 심사위원도 사람이다. 기계처럼 정밀하게 ‘채점’을 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공산품이나 오엠알 카드가 아니라 문학 작품을 심사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당연히 투고자도 사람이다. 지칠 수밖에 없다. 기백 기천명이 매번 몰려드는데 그중 단 한 명만을 뽑는 시험에서 통과하는 게 ‘나'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안정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매번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까지는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펼쳐져 있을 한 손가락이 될 수 없다면 오히려 희망고문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어디서 어떤 상을 받아야 등단인가, 도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한겨울에 본 어떤 장르작가의 에세이에는 국가에서 주는 SF소설상을 받았는데도 그것이 등단 자격으로 인정되지 않아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이냐면, 등단이라는 제도는 이른바 ‘순'문학 판에만 있는 것인데, 국가에서 작가를 지원할 때에는 순문학 외의 다른 장르 작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문학 작가 지원이 등단 제도를 기초삼아 (지원 자격에 등단 n년차 이상의 작가만을 모집한다고 명시한다든지) 기획되어 있다. 그러니까 어떤 작가들은 작가인데도, 나라에서 작가에게 주는 최소한의 복지 혜택도 받지 못한다.
내가 등단이라는 제도를 얼마나 기이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충분히 설명한 것 같다. 아닌가? 이 주제로 삼박사일은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울면서. 지금까지 얘기한 것들은 대개 내가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소설 쪽과 관련된 이야기고, 시를 비롯한 다른 장르 얘기를 하자면 또 할 말이 많다. 최종심에 몇 번이고 진출했지만 아직도 당선되지 않은 사람 이야기는 도시 괴담이 아니다, 내 친구 중에도 있다. 그 친구는 시도 쓰고 소설도 써서 최종심 고배를 더블로 마셔 왔다. 그건 바꾸어 말하면 시도 잘 쓰고 소설도 잘 쓴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등단 제도 대신 일반 투고로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어떤 친구는 예술인복지협회 가입 자격 미달이라고 한다. 등단은 둘째치고 발표한 작품 수가 적어서 그렇다는데, 일반투고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 친구에게는 지면을 주려는 곳이 영 없어서 가입이 아직도 요원하다. 이들이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이들이 정말로 잘 쓰는 작가들이라는 것을 알아서 슬프고 화가 난다. 내가 알 수 없는 곳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재능과 노력들이 등단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지면을 얻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우리는 ‘던전’을 만들었다.
갑자기 광고 아닌 광고로 마무리 지으려니 영 민망하지만 사실 이 말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 했던 생각들을 쭉 정리해온 것이다. 혹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던전을 만들었거나,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던전은 지면의 확장, 작가와 독자의 교통을 생각하며 만든 웹-문학 플랫폼이다. 웹소설 플랫폼에 익숙한 장르 작가, 독자들이라면 던전이 영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순'문학 플랫폼이 던전이라는 이름을 쓴다고 반발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한데) 우리는 순문학보다 좀더 넓은 범위를 생각하고 있다. 작가에게는 무한한 지면을, 독자에게는 매일 새 읽을 거리를, 출판사들에게는 새로운 작가의 웹 포트폴리오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했다고 믿는다. 던전의 출현이 등단 제도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는 (그러면 좋겠지만)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모두가 던전의 존재를 통해 그것, 100년 가까이 이어져온 거의 유일한 정식-작가배출의 제도를 딱 한번씩만이라도 의심해줬으면 좋겠고, 적어도 우리가 만든 던전 안에서만큼은 그 제도가 아무 의미도 없기를 바란다. 이것이 거창하다면 거창하고 소박하다면 소박한, 던전지기 중 한 명으로서 내가 품어온 소회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박서련
“이 글은 던전(http://www.d5nz5n.com)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