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부터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은 2019년 한국 영화 라인업 중 가장 기대되는 작품으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꼽았습니다. 한강에 괴물을 등장시키고, 추위로 멸망한 지구를 가로지르는 열차를 배경으로 액션 활극을 선보였던 감독이었으니, 영화에 말 그대로 ‘기생충'이 등장한다 한들 이상할 것이 없었죠. 하나 둘 영화에 대한 정보가 밝혀지면서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벌레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포스터가 공개되고, ‘가족 희비극' 이라는 카피가 붙었을 때는 더욱 실망했습니다. 제가 떠올린 가족 희비극은, 오래전 김지운 감독의 영화 <조용한 가족>이나, 최근 방영된 드라마 <스카이 캐슬>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화가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제 최고상이잖아요. 대통령이 축하할 만큼 대단한(?) 일이었고, 모두가 영화 <기생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벌레가 나오지 않고(사실 제 기억으로는 한 마리 나옵니다 = 곱등이), 가족들만 바글바글한 영화의 매력이 무엇일까. 아무리 칸이 ‘가족'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영화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황금종려상까지 안겨준 매력은 무엇일까. 개봉일 가장 이른 시간 영화를 예매하고,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을 천천히 다시 감상하며 기다렸습니다.
기생충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개봉: 2019.05.30.
(주의) 최대한 조심하였으나, 스포일러에 예민하신 분들께는 불편한 글일 수 있습니다.
예측 가능성과 디테일
대저택과 반지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지금, 여기의 우리.
의심의 여지없이, 노골적으로 양극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위 ‘정상가족'이라고 불리우는 두 가족이 등장합니다. 한 가족은 하우스 호러 영화를 찍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대궐 같은 집에 살고, 한 가족은 매일 밤 취객들이 오줌을 싸는 반지하에 살죠. 반지하에 사는 가족이, 대궐 같은 집에 사는 가족에게 기생(?)하는 이야기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전작 <설국열차>에서도 노골적으로 계급의 문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 1등칸부터 꼬리칸까지 철저히 계급화된 열차를 배경으로, 꼬리칸의 영웅 캡틴 아메리카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가 머리칸까지 진격하는 이야기입니다. <홍길동전>이나 <임꺽정>이 떠오를 정도로 노골적이죠.
노골적인 주제 의식은 오히려 이야기를 간결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간결한 이야기는 복잡한 이야기보다 힘이 세죠. 반면, 간결한 이야기는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소비해 온 설화, 민담, 신화와 비슷한 구성을 취하기 때문이죠. 간결한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다음 이야기를 예측하게 되고, 높은 확률로 그 예측이 맞아떨어집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은, ‘그저 그런 뻔한 이야기였어' 하고 말하죠.
<설국열차>도, <기생충>도, 어쩌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꼬리칸에서부터 혁명을 일으킨 커티스가 도착하게 될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반지하에 사는 가족들이 대궐 같은 집에 사는 가족들에게 기생하면서 벌어질 만한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요? <기생충> 역시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별명이 또 뭡니까. 봉테일, 디테일에 엄청 신경 쓰는 분이잖아요. <기생충>은 뻔하고 예측 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들을 다루는 방식이 지독할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분명히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꼭 우리 주변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에요. 길을 잘못 들어 도착한 평창동 골목에서 봤던 대저택의 대문 안쪽에는, 꼭 이선균과 조여정이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송강호와 장혜진이 살고 있는 집은, 정말 제가 살았던 석관동 반지하와 똑같이 생겼단 말이죠. 윗집 와이파이 신호를 찾아 헤매던 모습까지 똑같아요.
저 같은 사람들은 반지하에 공감할 것이고, 부유하게 자란 분들은 대저택에 공감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모두 어쩌면 대저택과 반지하 사이 그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저는 대저택에 살지는 않지만, 이선균의 대사 ‘선을 넘는 사람이 너무 싫어'에 공감해요. 동시에 저는 (지금 현재) 반지하에 살고 있지 않지만, 옷에서 나는 생활의 냄새(영화 속 ‘반지하의 냄새')를 깨닫고 부끄러워한 적이 (자주) 있어요. <기생충>의 디테일은, 영화 속 두 가족, 총 8명의 인물들을 모두 현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사람들로 그리는 데에 성공했어요. 8명 중 최소한 한 명에게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까요? 저는 여러 명에게서 제 모습을 발견했고, 그래서 부끄럽고, 그래서 슬프기도 했죠.
다양한 장르를 익숙하게 엮어낸 솜씨
가족 코미디 + 하우스 호러/스릴러 + 사회파 드라마
영화 <기생충>이 칸에서 공개된 직후, 전 세계 언론의 호평이 쏟어졌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 중 하나는, 봉준호 감독이 ‘독보적인 장르'를 구축했다는 류의 이야기들이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기생충>이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장르를 창조해냈다는 평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기존에 사랑받았던 익숙한 장르들을 상당히 익숙하게 엮어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기생충은 약 130분 정도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어요. 그중 대략 절반, 그러니까 60분 정도까지 영화는 열심히 웃겨요. 가족 코미디 장르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죠. 특별한 환경에 사는, 특별한 환경에 적응한 가족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코미디에요. 반지하의 가족뿐 아니라 대저택의 가족도 마찬가지죠. 적극적인 풍자가 성공적으로 진행돼요. 실제로 웃기고, 저도 실컷 웃었고, 함께 영화를 본 다른 관객들도 신나게 웃더라구요. 물론 발랄한 코미디는 아니에요. 풍자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60분을 지나면서, 새로운 공간과 인물이 등장해요. 반지하의 가족들이 대저택의 가족에게 기생하는 데에 성공한 직후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대저택에는 아니나 다를까 숨겨진 000과 00이 있었고, 그 000과 00은 기생에 성공한 가족을 위협하죠. 전형적인 하우스 호러/스릴러의 규칙이에요. ‘새로운 집에 이사를 온 가족, 그런데 그 집에는 위험한 비밀이 있다!’ 이런 식인 거죠.
약 40분간 진행되는 하우스 호러/스릴러 역시 상당히 재미있어요. 가족 코미디에서 실컷 웃고 나면, 스릴과 공포를 즐길 수 있는 것이죠. 장르의 특성대로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공포와 아슬아슬한 스릴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요. 물론,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있고, 봉준호 감독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톤을 유지합니다.
마지막 30분은 이 모든 사건을 봉합하는 데에 쓰여요. 사건을 정리하고 봉합하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저는 조금 지루하더라구요. 가족 코미디의 결말도 아니고, 하우스 호러/스릴러의 결말도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굳이 말하자면 ‘사회파 드라마' 정도로 부르고 싶어요. 카메라는 갑자기 인물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우리 사회의 문제들과 영화 속 이야기를 겹쳐 보이게 만듭니다.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이전의 100분과는 결이 달라서, 저는 조금 당혹스러웠어요. 이전의 100분 동안은 코미디와 하우스 호러/스릴러 장르의 쾌감을 제공하면서 디테일을 통해 메세지를 다소 우회적으로 전달했거든요. 그런데 마지막 30분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쉬웠어요.
<기생충> 시간대별 장르 구분
00 ~ 60분 : 가족 코미디
60 ~ 100분 : 하우스 호러/스릴러
100 ~ 130분 : 사회파 드라마
기미신궁's 추천 포인트
#1. 봉준호 감독 영화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래도 추천합니다.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아요.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느껴졌거든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새롭고 신선하고 도전적인 작품이라는 인상은 받지 못했어요. 오히려 친절하고, 노골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죠. 봉준호 감독은 스스로를 ‘장르 영화감독'이라고 정의했지만, <기생충>이 아주 뾰족하고 특정 장르 매니아들만을 위한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벤저스 : 엔드 게임> 정도만 좋아하셨어도 재미있을 거예요.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 <어스>를 즐기셨다면 더욱 재미있게 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 저 무서운 거 잘 못 보는데요, 피 많이 튀나요?
피 많이 안 튑니다. 피가 안 나온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막 잔혹한 장면이 나오지는 않아요. 물론 다치고 죽는 장면들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그 장면에 확 몰입하거나 충격을 받도록 연출하지는 않았어요. 연쇄살인마, (폭력/고문도 불사하는) 지독한 경찰 같은 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들 너무 착한 사람들만 나오니까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3. 봉준호 감독의 팬이라면
말해 뭐 합니까.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 보고 직접 말씀하셔야죠.
#4. 엄마 아빠랑 같이 봐도 되나요?
충분히 친하다면 보세요. ‘친해지길 바래 영화 나들이’ 라면 다른 거 보세요. <알라딘> 이라거나… (아, 혹시 ‘엄빠주의' 장면을 묻는 것이라면… 있기는 합니다만 과도한 노출이 있는 것은 아니니 괜찮을 것 같아요.)
#5. <기생충>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가 있을까요?
일단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김기영 감독의 <하녀> <충녀> 등과 함께 보면 좋다고 했는데요, 이거 뭐 너무 옛날 영화라 찾기도 힘들고 보기도 힘들더라구요. 저는 포기했어요. 오히려 제가 추천하는 영화는 조던 필 감독의 <어스>입니다. 주제의식도, 표현 방식도 유사다고 생각해요. 제가 <기생충>을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영화이기도 하구요.
<어스>
기미신궁's 생각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웰메이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요. 코미디 장르와 하우스 호러/스릴러 장르의 재미가 살아있고, 동시대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도 탁월하고, 캐릭터들의 매력도 충분합니다.
특별히 박소담 배우와 조여정 배우의 매력을 듬뿍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두 배우 모두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기생충>에서 보여준 연기는 특별히 매력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만 집착하는 듯하여 아쉬웠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펼쳐 놓은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함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방식이 너무 올드했다고 할까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임을 감안할 때, 대통령이 직접 축하 메세지(지난 1년간 제작된 세계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까지 보낸 것을 고려할 때, 아쉬운 지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늘 새롭고 충격적인 영화를 내놓고, 다른 창작자들에게 마치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고 선언하는 듯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거든요. 보수적이고, 안전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봉준호 감독도 나이가 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영화를 다루는 방식 역시 변해가는 것이 자연스럽겠죠. 이러한 아쉬움은 봉준호 감독 개인이나 <기생충>을 향한다기보다는, 한국 영화계의 감독 풀(pool)을 향하게 됩니다. 한국 영화는 언제쯤 <살인의 추억>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요?
글. Shin(김신) "쿠키 영상은 없지만, 엔딩 크레딧을 보다 보면 노래 하나가 흘러나옵니다. <소주 한잔> 이라는 노래인데요, (임창정과는 관계 없음) 봉준호 감독이 가사를 쓰고, 최우식 배우가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듣기에는 그냥 저냥 옛날 노래 같아요. 기왕 극장에 가신 김에 끝까지 듣고 오시길."
편집자. "오늘 퇴근 후 바로 영화관으로 달려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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